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짧고도 길었던 사랑 이야기 [역사 속으로]

김형민 2023. 3. 26.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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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마리아가 김철수에게 말했다. “혁명운동 하는 동안 같이 사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사랑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지만 김철수의 마음에도 김마리아가 남았다.
김마리아(왼쪽)가 미국에 머물 당시, 상하이에서 돌아온 안창호(가운데)를 환영하며 찍은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사랑은 곧잘 비극적이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 이뤄져서는 안 될 사랑 등등. 사랑의 작대기들은 맞아떨어지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비극의 크기 또한 각양각색이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만 남긴 채 가물가물 추억 속에만 걸쳐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평생에 지울 수 없는 화인(火印)으로 마음속을 갈라 흐르는 은하수로,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으로 또박또박 새겨지는 사랑도 많다. 1944년 3월13일 해방을 한 해 앞두고 숨져간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2~1944)와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맹장 김철수(1893~1986)의 사랑도 그중 하나였다.

김마리아는 그 ‘집안’이 일단 빼어났다. 1883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소래마을에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인 소래교회(솔내교회라고도 한다)가 세워진다. 이 교회 설립에 가산을 털어 보탠 사람이 김마리아의 아버지 김윤방이었다. 말이 1883년이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도 전이다. 그 시절에 개신교를 받아들일 정도면 조선 팔도 누구에게 견주어도 ‘개화한’ 인사였으리라. 그러다 보니 집안사람들 이력도 범상치 않다. 김마리아의 고모부는 우사 김규식이고, 친척들 중 독립운동가가 수두룩했다.

김마리아 역시 독립 의지에 불탔다. 일본 유학 중 2·8 독립선언 현장에 참여한 뒤 젊은 날의 이광수가 사나운 문장으로 포효한 2·8 독립선언서를 품고 조선에 돌아온다. 현해탄을 건너는 그는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독립선언서를 기모노의 허리띠(오비)에 숨겼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투옥되고 석방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김마리아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회장으로 독립운동 일선에 나선다. 하지만 애국부인회는 곧 일제 경찰의 사냥감이 된다.

옥고를 치르는 김마리아에게 상상을 초월한 고문이 퍼부어졌다. 매달아놓고 고춧가루 물을 퍼붓는 고문 때문에 그녀는 평생 귀와 코에 고름을 달고 살았다. 일본 경찰과 그 하수인들은 생식기에 화침(火針)을 놓는 만행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김마리아는 그 고통을 버텼고 재판정에서는 오히려 결기를 빛낸다. 공판정에서 일본 검사는 심문 당시 김마리아의 반역(?)을 이렇게 폭로하고 있다. “가증한 것은 본직에게 심문을 당할 때에 오연히 ‘나는 일본의 연호(年號)는 모르는 사람이라’ 하면서 서력 일천구백 몇 년이라고 했다(〈동아일보〉 1920년 6월11일).”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하늘 같은 일본 검사에게 “나 너희들 연호 몰라” 하고 내뱉는 여성.

고문 후유증으로 집행유예를 받고 요양 중이던 김마리아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로 탈출한다. “병에 울고 있는 김마리아가 어디를 가랴. 멀리 간다 한들 시내에서 뺑 돌겠지(〈동아일보〉 1921년 8월5일).” 안심하고 있던 일본 경찰의 뒤통수를 여지없이 휘갈기는 ‘영광의 탈출’이었다. 1923년 상반기, 상하이에서는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임시정부의 ‘개조냐, 창조냐’를 놓고 치열한 격론이 벌어진 이 회의에서 김마리아는 비운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 고려공산당 상하이 파견 대표 김철수였다.

이때에도 김마리아의 몸은 온전치 못했다. “그는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를 못했다. 30분을 못 넘겼다. 의자에 앉아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가만히 견디지를 못했다. 빈자리를 찾아 옮겨 앉아야 했다. 때로는 자리에 앉았다가 서 있기를 반복했다(〈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극장).” 하지만 그 와중에 김마리아는 같은 개조파(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일원으로 열변을 토하는 나이 한 살 아래의 김철수를 범상치 않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 서른을 넘어 홀로였던 김마리아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많았다. “어떻게든 좋은 남자를….” 발 벗고 나선 사람은 도산 안창호, 그리고 다름 아닌 김철수였다. 둘은 나이 지긋하고 인품 좋은 노총각 장진영을 찾아냈고 장진영 본인도 김마리아에게 평안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김마리아는 완강히 거절했다. 안창호가 사정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때 제주도 출신 흥사단원 양한라와 2·8 독립선언 주동자 정광호가 끼어든다. 그들이 내민 카드는 엉뚱하게도 김마리아 시집보내기 공동위원장(?) 격이던 김철수였다. “우리가 보기에는 김마리아는 김철수에게 마음이 있습니다.” 그들은 곧장 김마리아의 마음을 확인해본다. 놀랍게도 “그녀는 수줍게 승낙했다(〈독립운동 열전 1〉 임경석 지음)”.

김철수도 김마리아에게 끌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견결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리고 고향에 본처를 두고 도시의 ‘신여성’을 자연스럽게 연인 삼아 중혼(重婚)도 서슴지 않던 당시의 얼굴 두꺼운 남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나한테 시집오면 첩이 된다. 내가 승낙하면 두 여자에게 죄를 짓는 일이 된다.” 그러나 김마리아의 마음은 어지간히 뜨거웠다. 그녀는 이렇게 마음을 전해온다. “혁명운동 하는 동안 같이 사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운동을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편히 살려 하신다면 갈라서도 좋습니다(위의 책).”

김마리아 사진을 벽에 붙여둔 김철수

혁명운동, 즉 독립운동 할 때 동반자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며 이 험난한 역사가 평탄해진다면 본부인에게 돌아가도 상관없다는 간절한 소망. 하지만 김철수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 둘이 결혼한다면, 운동 일선에서 벗어나 어디 가서 교원질이나 하면서 살 수도 있고…. 기혼남의 첩 신분이 되는 것이니 그녀를 모욕하는 것이다.”

결혼 거절 의사를 명확히 전달받은 후 김마리아는 앓아누웠다고 한다. 실연의 상처였을까. 그때 문병을 갔던 김철수는 머리 풀고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던 그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한다. 해방 후 김철수는 남로당 박헌영과 격렬히 대립하다가 좌익 운동을 포기한 채 평생 초야에 묻혀 산다. 3남 2녀 중 대부분의 자식이 분단과 전쟁 와중에 제명에 살지 못하거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비극 속에서도 그는 나이 아흔넷까지 장수하다가 1986년 세상을 떠났다. 말년의 그는 옛 동지 김동삼, 그리고 김마리아의 사진을 벽에 붙여두고 ‘용서하라’는 말을 되뇌며 살았다고 한다. 김철수의 토로를 연작시로 쓴 이용범의 작품 일부다. “마리아는 나와 혼담이 있었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죽고 말았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슬펐습니다/ 그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리하여 수십 년간 가슴에 마리아 사진 넣고 다녔습니다/ 원체 안쓰러워서.”

일제의 고문으로 평생 후유증을 앓던 김마리아는 마지막 순간 극심한 고통 속에 떠났다. 간호하는 사람들조차 “세상에 무슨 미련이 있는가. 어서 주님의 품에 안기시오(〈조선일보〉 1957년 7월18일)” 하며 절규할 정도였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숨결이 순하게 낮아지며 눈을 곱게 감고 일그러져서 씰룩씰룩하던 입이 바르게 다물어지고 형용할 수 없이 사납던 얼굴에 화기가 돌며 기쁨에 충만한 웃음이 방긋이 입가에 떠돌아졌다”라고 한다. 마치 “그의 가장 행복스럽던 청춘 시절의 어느 한 날을 가져온”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김마리아는 상하이의 격렬한 회의장에서 마주쳤던, 반듯하고 교양 넘치는 공산주의자 김철수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이루어지지 않았을망정 너무나 절실했고, 나중에는 어찌될망정 그 순간 뜨겁게 함께하고 싶었던 자신의 열망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은 것이 아닐까. 김마리아는 그렇게 아프게 살다 갔지만 향후 40년 가까이 김철수의 가슴에 살아 있었다. 평범한 사랑조차 힘겹고 여러 겹의 장벽을 넘어야 했던 시대의 공산주의 혁명가와 독실한 개신교인의 만남은 짧았지만 한편 그토록 길었다.

김형민 (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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