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개는 맞고 나서 만터우를 먹었다 [밥 먹다가 울컥]

박찬일 입력 2023. 3. 26.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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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였던 찐개네 집 앞을 지나면 늘 중국집 냄새가 났다. 찐개와 내가 함께 맞은 날 그는 나에게 만두를 줬다. 그것도 속이 없는 진짜 만두, 만터우를.
화교였던 ‘찐개’는 늦은 여름밤이면 내의 바람으로 담벼락에 기대앉아 중국식 만두를 먹었다.ⓒYayImages

 

우리 동네 살던 친구 ‘찐개’가 내민 건 만두였다. 오래된 중국집 홀에서 맡던 냄새가 나던. 녀석이 한번도 내게 주지 않았던 만두. 나는 만두를 정말 좋아했다. 찐개 같은 ‘짱꼴라’가 먹는 만두가 진짜라고들 했다. 내 호기심은 더 높아져갔다. 찐개에게서 최초의 진짜 중국 만두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1977년도 쯤이었을까. 그와 내가 옆 동네에서 신나게 얻어터지고 난 후였다. 친해지기 어려웠던 찐개랑 그날 비로소 친구가 되었다. 나의 화교(음식)에 대한 오랜 짝사랑은 그렇게 한 계단 올라섰던 것 같다. ‘짱꼴라’가 준 만두를 먹었으니까. 그것도 속이 없는 진짜 만두를.

우리가 얻어터진 옆동네는 ‘고택골’이라고 불렀다. 무연고 ‘유택(묘지)’이 많았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화장터가 있었는데 굳이 거기까지 가서 돈 주고 화장을 하느니 이 동네에다 묻어버렸을 거다. 그때 듣기로는 6∙25전쟁 때 북으로 퇴각하던 인민군이 남한의 높은 사람들(?)을 사살한 시체들이 묻혀 있다고 했다. 동네 어떤 노인은 6∙25만 되면 태극기를 꺼내들고 막걸리를 뿌리며 위령제 비슷한 걸 했다. 협찬인지 돈을 주었는지 알 수 없는 무당이 와서 무복을 입고 징징지잉 깨깨갱갱 쇠로 된 악기를 치던 기억도 난다. 붉은 시루팥떡을 얹어놓은 사과 상자(상차림 대용이었을)도 있었다. 붉은 떡이 무서웠다. 무연고 묘지가 있던 동네였으니, 서울의 바닥이자 마지막 경계에 있는 변두리였다. 동네에는 갱생원까지 있었다. 우리가 ‘수녀 아줌마’라고 부르던 분들이 갱생원에서 일을 보았다. 갱생원 수용자들이 어딘가 작업을 갔다가 줄을 맞춰 삽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거나, 동네에서 작업하는 것도 많이 보았다.

발랑 까져서 세상 무서울 게 없던 우리들도 이 아저씨들에게서 위압감을 느꼈다. 깡패들 곤조 싸움도 흔하게 보던 우리들인데도 그랬다. 소주병 서너 개를 바닥에 팽개쳐 깨곤 거기에 웃통을 벗고 구르는 깡패를 봐도 그냥 볼만한 구경거리 정도였다. “야, 저 아저씨 살살 구른다?” 초등학생 정도인 우리들이 그 피범벅의 현장에서 하는 말의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남 해코지하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는 갱생원 아저씨들인데도 묘하게 무서웠다. 갱생원은 연고 없는 사람들, 행려들, 알코올중독자들, 설사 연고가 있어도 가족 그 누구도 꺼내가지 않는 사람들이 수용되는 곳이었다. 그들의 무표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게 포기 같은 거라는 생각은 나중에 들었고. 중학생이 되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같은 소설을 보면서 그 갱생원 아저씨들을 떠올렸다. 버려지거나 기약 없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이 나가지 못하고 수용 상태에서 죽어서 동네 어딘가에 묻혀 있다고 했다. 내가 그 동네에, 보통 ‘산 ○○번지’라고 부르던 서울의 수많은 변두리 중 하나였던 고택골 언저리에 들어가 살던 때가 1970년대 초반이었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이 동네가 무연고자 묘지였다. 옛날엔 많이 태어나고 많이 죽었다. 묘를 쓸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 리어카에 거적 씌워서 여기 갖다 묻었다. 서울 인구가 폭발했다. 죽은 자 위에다 누가 또 묻었고, 그 옆에 또 묻었다. 동네에서 하수구 작업을 하다가도 대퇴골 같은 게 툭툭 튀어나왔다. 그런 광경을 봐도 워낙 흔한 일이라 우리 같은 애들도 잠깐 구경하다가 흥미를 잃었다.

찐개는 그런 우리 동네를 나와 함께 누볐다. 고택골에 아지트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지트. 듣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 아이들은 왜 굴을 파거나 숨으려고 할까. 우리들은 야산에 아지트를 팠다. 고택골에는 누군가 깊고 튼튼하게 파놓은 굴이 있었다. 원래 간첩이 쓰던 아지트라고 했다. 그 안에는 이미 임자가 있었는지 온갖 물건이 있었다. 주간지에 낡은 담요 같은 것들. 거기에 기어 들어가서 찐개랑 하늘의 별을 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타난 고택골 형들에게 세게 맞았다. 찐개는 대들다가 더 맞았다.

“니가 신일 사는 뙤놈(되놈)이지? 이 새끼.” 신일의 정식 이름은 신일연립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수준의 연립은 아니었다. 그냥 수용소처럼 방 하나, 간이 부엌 하나인 벌집이었다. 이름만 연립이었다. 찐개는 화교였다. 힘도 세고 성깔도 있어서 이미 인근 동네에 소문이 났던 모양이었다. 그때는 동네마다 주먹과 ‘곤조’ 선수권 대회 같은 게 열렸다. 장소는 어른들의 감독을 피할 수 있는 야산 능선의 산소들 옆이었다. 동네마다 중학생 정도 되는 왕초들 라인이 서로 소식을 주고받는다. 대회를 한번 열자고. 체중 같은 걸 재는 법은 없었고, 학년 단위였다.

초등학교 5학년 정도가 되면 이 스트리트 파이터의 세계, 꼬마 깡패이자 일진에 입문할 수 있었다. 5학년에서 중1·2까지가 해당자였다. 찐개는 5학년이 되자마자 근동의 4강자 정도로 소문이 났고, 두 번 싸우고 챔피언이 되었다. 찐개는 힘이 셌지만 마음이 약했다. 싸움이 나서 승부가 기울면 결정타 한 방을 날려주는 게 불문율이었다. 코피를 줄줄 흘리게 하거나, 입술을 터뜨려줘야 싸움이 끝났다. 마음 약한 찐개는 그렇게 못했다. 대회를 유치한 형들이 찐개를 때렸다. ‘짱꼴라 새끼’라고, 마지막 펀치를 날리지 않는다고 또 때렸다. 곰 같은 찐개는 말없이 맞았다. 그날 나는 ‘1회전’에서 늘씬 맞았다. 둘이 함께 맞고 와서 그가 주는 만두를 먹었던 것이다.

중국식 만두는 속이 없었다

찐개네가 뭘 벌어먹고 사는지 몰랐다.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했다. 아버지는 대만(타이완)을 드나들며 무역을 한다고 했는데, 그런 거창한 사업을 할 리 없었다. 정말 사업가라면 하수도 파다가도 사람 뼈 나오는 동네에 살 것 같지는 않았다. 한번은 그의 아버지가 동네에 뭘 팔고 다녔다. 카메라였다. 일제 야시카, 미놀타보다 좋은 거라고 했다. 몇몇이 샀다. 명동의 중화민국 대사관에도 드나들며 일했기 때문에 화교 사정에 밝은 우리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더니 한마디하셨다.

“그거 장난감 같은 싸구려일 거다. 찐개 아버지가···.”

찐개네 집 앞을 지나면 늘 중국집 냄새가 났다. 찐개 엄마는 한국인이었는데 음식은 중국식이었다. 석유풍로에다 검은색 냄비를 놓고 돼지기름 녹여서 뭔가를 볶았다. 찐개랑 그의 형이 어느 늦여름 밤에 신일연립 담벼락에 내의 바람으로 앉아 만두를 먹던 장면이 기억난다. 그건 간식이 아니라 밥이라는 걸 우리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입만”을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때 이미 중국식 만두를 알았다. 진짜 만두는 속이 없다는 걸. 찐개는 쪄낸 하얀색 빵 배를 갈라서 어머니가 볶은 무언가를 끼워서 먹었다.

“엄마가 그랬어. 중국 만두는 속이 없다고.” 내게 찐개는 최초의 국제 요리 선생님이었다. 사람들은 각자 다 다른 걸 먹는다고. 그걸 알아야 한다고. 내가 뙤놈이라는 말을 싫어하게 된 것도 찐개 덕이었다. 찐개는 중학교에 갔다. 까만 교복은 비슷했는데, 국방색 천으로 된 가방을 멘 것이 멋졌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게 무슨 학도병 유격복 같기도 했다. 중화민국은 대륙의 공산당과 전쟁을 치르는 중이어서 그랬을까.

찐개는 타이완으로 떠났다. 학교도 잘 가지 않고 한국 애들과 어울려서 중국어도 잘 못하던 찐개는 잘 적응했을까. 나는 이 글을 쓰기까지 40년 동안 그 생각을 했다. 찐개는 잘 살고 있을까. 나를 기억할까. 내게 만두를 준 것도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 나란 존재를 잊지는 않았을까.

타이완으로 떠난다는 찐개와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은 만두였다. 부엌 찬장에 들어 있던 식은 만두. 만터우. 죽죽 찢어 먹으면 맛있는 만터우.

박찬일 (셰프)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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