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매달리고 남자는 싫증내고?…가사가 너무 괘씸해!

한겨레 입력 2023. 3. 25. 18:05 수정 2023. 3. 2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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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심야방송을 연출하다 보니 사랑노래를 틀어달라고 신청하는 분이 참 많다.

남자 가수가 부른 노래 중엔 이루지 못한 사랑을 놓지 못하는 내용은 흔해도 바람피운 여자에게 매달리는 가사는 거의 없다.

유독 여자 가수들 노래에 그런 내용이 많다.

이 노래를 좋아하고 심지어 그 시절 명곡으로 꼽는 분들에겐 죄송한데 키스의 '여자이니까'는 앞으로도 안 트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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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 22년차 라디오 피디의 ‘나만의 금지곡’
‘여자이니까’ 뮤직비디오 한 장면. 화면 갈무리

요즘 심야방송을 연출하다 보니 사랑노래를 틀어달라고 신청하는 분이 참 많다. 선곡하기 전에 노래를 다시 들어보는데, 오랜만에 1990년대 노래를 듣고 깜짝 놀라곤 한다. 버림받은 여자의 순애보를 노래하는 가요가 너무 많아서다. 남자 가수가 부른 노래 중엔 이루지 못한 사랑을 놓지 못하는 내용은 흔해도 바람피운 여자에게 매달리는 가사는 거의 없다. 유독 여자 가수들 노래에 그런 내용이 많다.

1998년에 나온 핑클의 노래 ‘루비’ 가사를 보자. 그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걸 알고, 상대 여자를 만나 모욕까지 당한다. 그런 험한 꼴을 당하고 헤어지면서도 남자에게 애원한다. 이렇게.

“먼 훗날 혼자가 되면 나에게 돌아올 수 있겠니?
잠시 넌 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 거야.
언제든 다시 돌아와. 난 여전히 너의 여자야.”

저기요, 잊어버리세요. 참 바보 같은 ‘여자’군요 당신! 그런데 이 ‘여자’로 추정되는 인물은 몇달 뒤 발표되는 신곡에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뭐라고 노래하는지 들어보자.

“나를 포기했어. 너만 사랑했어. 그것만으로도 부족했었나?
바보 같은 내게 이럴 수 있어?
다시 생각해봐. 내게 이러면 안 돼. 너 없인 살 수가 없어.
제발 나를 도와달라고 애원하며 붙잡고 싶어.”

처연한 발라드 같지만, 무려 코요태의 댄스곡 ‘순정’의 노랫말이다. 세상 신나는 댄스곡 가사가 이랬으니 그 시절 발라드는 어땠겠는가. 뭐 20세기 노래 속 ‘여자’들은 그랬다 치자. 내가 꼽는 최악의 노랫말은 21세기가 시작되고 나왔다. 2001년에 발표된 키스의 ‘여자이니까’ 가사를 보자.

“도대체 알 수가 없어. 남자들의 마음.
원할 땐 언제고 다 주니 이젠 떠난대.
모든 걸 쉽게 다 주면 금방 싫증 내는 게 남자라 들었어.
다시는 속지 않으리, 마음먹어 보지만 또다시 사랑에 무너지는 게 여자야.
여자의 착한 본능을 이용하지는 말아줘.”

당시 신입 피디였던 나는 처음 듣는 순간 결심했다. 내 손으로 이 노래를 트는 일은 없을 거라고. 20년 넘게 라디오 피디로 일하면서 이 노래를 신청하는 사연을 꽤 많이 받았지만, 꿋꿋하게 버텼다. 가사가 너무 괘씸해서다. 이 노래는 개인적인 감정을 노래하는 차원을 넘어 남성과 여성을 싸잡아 편견의 밧줄로 묶어버린다. 여자는 사랑에 무너져 모든 걸 내주는 존재이고,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쉽게 싫증 내는 존재라고. 거기서 한술 더 떠 여자는 배신당하고도 또 사랑에 무너지는 존재이고, 심지어 그게 ‘착한 본능’이라고 단언한다. 20년 전에도 지금도 나는 이런 정서에 동의하기 힘들다.

다행히도 이런 노래는 점점 사라져 요즘 신곡들 중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가요 시장에서 발라드의 비중 자체가 확연히 줄었기도 하고.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예전 발라드 가수들은 여전히 순애보를 담은 노래를 발표하기도 하지만, 가수의 나이가 어릴수록 노랫말의 변화는 뚜렷하다. 실연 후의 아픔을 다룬 노래도 배신한 상대에게 무작정 매달리기보다는 내면의 슬픔 그 자체를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대로 남자니까, 남자기 때문에 어쩌고저쩌고, 남성성을 강요하는 노래들도 함께 사라져 다행이다. 사나이 운운하는 노래보다는 돈 자랑하는 ‘플렉스’(자신의 성공이나 부를 과시한다는 의미)가 낫다.

노랫말은 시대상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노랫말이 이런 식으로 바뀌었다는 건 젊은 세대들에게 더 이상 구시대적인 성역할을 강요해선 안 된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남녀 간의 신체적 차이를 인정하고 고려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라는 이유로 특정한 희생과 인내와 행동방식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을 비틀어 말해본다. 그때는 맞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틀린 노래들이 있다. 이 노래를 좋아하고 심지어 그 시절 명곡으로 꼽는 분들에겐 죄송한데 키스의 ‘여자이니까’는 앞으로도 안 트는 걸로.

이재익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박은경의 스위트 뮤직박스>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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