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유쾌하고 또 유쾌한 사람, 작가 정지아

윤춘호(논설위원) 2023. 3. 25.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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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빨치산의 딸'에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로…다음 이야깃거리는?

힘 빼고 쓰니 대박 났어요

누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허리가 꺾어지게 웃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살아온 이력을 보니 진지한 사람일 듯했고 처음 봤을 때도 얼굴에 ‘난 진지한 사람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는데 막상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유쾌하고 또 유쾌한 사람이었다. 지난해 낸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책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도서관에서 그 책 빌리기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렵고 이 사람이 쓴 다른 책도 대부분 대출 중이다. <자본주의의 적> 같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 소설집조차 거의 3주를 기다려 겨우 대출받을 수 있었다.

지난달 23일 어렵게 통화가 돼서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다음 달까지 거의 매일 강연과 독자 사인회 일정이 잡혀 있어 좀처럼 틈을 낼 수 없다며 난감해했다. 몇 개의 날짜를 두고 시간과 장소를 조율한 끝에 주말인 이달 11일 경기도 평택에서 보기로 했다. 그날 거기에서 강연회가 있는데 거기도 좋다면 강연회 전에 시간을 낼 수 있을 거 같다고 했다. 

연한 화장에 수수한 차림이었다. 약속한 11시 반에 맞추기 위해 전남 구례에서 아침 6시 반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KTX 타면 한 시간 남짓이면 올 수 있으려니 싶었는데 구례에서 평택으로 오는 KTX가 없다고 했다. 거절해도 그만일 수 있는 인터뷰를 위해 새벽밥 먹고 와준 성의가 고마웠다. 잇따르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과 반복되는 비슷비슷한 질문이 다소 귀찮고 번거롭게 느껴질 법도 한데 자기 책 읽어주는 독자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만남에 성의를 다하려는 태도가 느껴졌다. 
 

“한 번도 주류가 아니었어요”



아버지가 빨치산, 어머니도 빨치산이었다. 아버지 정운창은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부장, 어머니 이옥남은 남부군 정치지도원이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전남 지역에서 활동한 유명한 사회주의자였고 어머니도 지리산 등에서 4년 동안 빨치산 생활을 했다. 그 대가로 아버지는 두 차례에 걸쳐 17년, 어머니도 7년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평생 사회주의 혁명가의 신념을 포기한 적이 없는 두 사람의 외동딸이 이 사람, 작가 정지아다. ‘지아’라는 이름은 자신들이 빨치산 투쟁을 벌였던 지리산의 ‘지’와 백아산의 ‘아’를 따 지었다.


어머니 나이 마흔, 아버지 나이 서른여덟 살에 본 외동딸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극진했다. 어린 시절 아무리 추운 날에도 차가운 신발을 신은 적이 없다. 어머니는 신발을 가슴에 품어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 줬다. 아버지는 딸이 좋아하는 채소를 손수 길러 타계하기 직전까지 입 짧은 딸의 먹거리를 챙겼다. 

아버지가 ‘빨갱이’이었다는 것을 안 것이 1974년,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반공방첩’, ‘때려잡자 공산당’이라는 구호가 곳곳에 붙어있고 공산당은 머리에 뿔 달린 도깨비로 묘사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빨치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어머니를 졸라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서울은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곳이었지만 그 대신 가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장실도 없는 셋집에 살면서 처참한 가난을 경험했다. 그러나 가난은 그다음에 닥친 시련에 비하면 어려움도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 역시 빨치산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까지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된 사춘기 소녀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하기 쉽지 않다. 공부 잘하고 나가는 백일장마다 상을 독차지하던 똑똑한 ‘백일장 소녀’가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자신의 미래가 어떠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나라 전체가 ‘반공만이 살길이다’고 외치던 1970년대 ‘사회주의자’ ‘빨치산’이라는 말은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운 단어였고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은 벗어날 길 없는 천형이었다. 그 천형에서 벗어나고 싶어 닥치는 대로 책을 봤고 절을 찾고 교회를 다녔다.

그렇지만 누구도, 어디에서도 이 문학소녀의 절망을 위로해 주지도,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지도 못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부모와의 불화, 좌절과 방황의 시기였다. 학교 성적이 제대로 나올 리 없었다. 재수 끝에 1984년 중앙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외동딸이 법대에 가서 기자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소망과는 어긋나는 선택이었지만 작가의 길은 어쩌면 운명처럼 예비된 길이었다. 현실적으로 ‘빨치산의 딸’이 선택할 수 있는 길도 많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혁명가’ 부모의 삶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고 부모와도 화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가장 깨끗하고 건강한 핏줄을 이어받은 민중의 딸’이라고 생각했고, 학생 운동은 정해진 길이었다. 

1988년 이태가 쓴 <남부군>을 시작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잊힌 존재였던 빨치산 관련 수기가 쏟아졌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나온 것도 그즈음이었다. 1988년 실천문학사 대표였던 소설가 송기원이 아버지를 찾아와서 당신들 사연을 소설로 쓰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내 이야기는 내 딸이 쓸 거요”라며 거절했다. 그 무렵 이 사람은 지하 조직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이른바 사노맹의 문학 기관지 <노동해방문학>에서 일하고 있었다. 출판사는 문단에 등단한 적도 없는 이 사람에게 매달 집필료 30만 원에 집필실까지 제공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빨치산의 딸>은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빨치산 출신 아버지와 운동권 딸이 함께 쓴 역사 기록이다. 몇십 년 전 이야기를 어제 일처럼 말하는 아버지의 기억력에 딸이 문학적 표현을 입히고 시대 상황을 더했다.    

“아버님 기억력이 매우 좋으셨습니다. 그래서 몇 월 며칠 무슨 전투에서 남부군 대대장은 누구 휘하 몇 명 인솔하고 총 몇 정 획득, 이렇게까지 기억을 다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책을 보고 ‘읽을 만은 하더라’고 했고, 어머니는 ‘너무 잘 썼다’면서도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지 염려했다. 자신들의 가장 빛나고 뜨거웠던 청춘을 딸이 기록해 준 것만으로도 부모는 감동했을 테고, 딸은 읽을 만하다는 부모의 말 한마디로 집필의 수고를 보상받았다. <실천문학>에 연재된 이 글은 나올 때마다 화제를 모았고, 1990년 3권으로 출판돼 한 달 만에 10만 권이 팔렸다. 한 순간에 유명인이 되었고 ‘작가님’ 소리를 들었다. 


“제가 그때 스물다섯 살 어린 나이였는데 세간의 관심을 받아서 여성지 인터뷰도 하고 그랬는데 정말 그런 거 싫었거든요. 그렇지만 조직에서 널리 알려서 책 많이 팔아서 돈 모아야 되니까 하라고 해서 나갔단 말이에요. 사람들이 제 글 좋다고 하고, 저 스스로 소설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작가님, 작가님이라고 하는데 좀 무서워졌어요. ‘이거는 내 진짜 모습 아니다, 이런 게 필요한 시기에 이런 글이 나왔을 뿐이고 이런데 휘둘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내가 쓰고 싶은 글, 좋은 글만 쓰겠다, 그리고 그것으로 돈을 벌거나 명예를 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20대 청년 시절 혜성 같이 등장했지만 빛나던 시절은 길지 않았다. 이후 출판사에도 다녔고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해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했다. 민족사관고 교사로 교단에 선 적도 있고 중앙대를 비롯해 몇 개 대학에서 꾸준히 강의했고 지금은 조선대학교 초빙교수로 있다. 한번 결혼해서 아들 하나를 두었고 지금은 혼자 지낸다. 본인은 열심히 살았다고 했지만 <빨치산의 딸> 이후 삶은 곳곳이 공백처럼 느껴진다.  


- 1990년대 이후에는 단체나 조직 활동을 하신 거 같지는 않더군요.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조직 활동은 때로는 원칙을 무시하고 막 깨고 나가야 되는 측면도 있는데 저는 그런 거 하나하나가 굉장히 불편했고요. 저는 삶 속으로 스며들지 않는 이론 이런 게 불편했어요. 그런데 조직에는 그런 사람뿐이더라고요. 조직 활동이 내게는 안 맞는 거 같다, 나는 글로 말하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있고요.”

매년 두세 편의 단편을 발표했고 몇 권의 소설집을 냈지만 다작은 아니었다. 김유정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요산문학상 등을 받았고 평단의 평가도 나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터지기 전까지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찾기 어렵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나오기 전까지 ‘정지아’ 하면 여전히 <빨치산의 딸>이었다. 


“저는 글을 많이 써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문학이라는 것만 붙들고 고민하는 것이 저는 조금 아닌 거 같았어요. 저는 ‘문학의 고통은 삶의 고통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으로 잘 살면 그 성장이 내 글에 담기겠지 뭐 이런 마음이었어요. 그러니까 뭐 급할 거도 없었고요. 그냥 진짜 쓰고 싶은 거, 내가 세상을 보는데 달라진 것 이런 것들을 일 년에 두 편, 많을 때는 서너 편 쓰면서 세월을 지내왔던 거 같아요”

청소년용 위인전을 많이 썼고 <천국의 이야기꾼 권정생>같이 정성을 기울인 만큼 호평을 받은 책도 있지만 어떤 책들은 돈을 벌기 위해 쓴 것도 사실이다. 이번 책이 뜨기 전까지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열심히 살았지만 가난했고, 공부를 했지만 대학교수가 되지 못했고, 작가지만 내세울 만한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무엇보다 빨갱이의 딸이었다. 한 번도 주류인 적이 없었고, 주류일 수도 없었다. 

-젊은 나이에 대단히 화려하게 등장하신 셈인데 그 이후 30년이 넘는 세월은 크게 이름이 나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삶이 초라해 보일 수도 있겠다 싶은데 좌절감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그런 좌절감 같은 것은 별로 안 컸습니다. <빨치산의 딸>이 준 명예 같은 것은 가짜라고 생각했고 그런 것에 휩쓸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 스스로 도망쳤거든요. 제가 만약 그런 명예 같은 것을 원했다면 그런 사회적 이슈를 건드리는 소설들을 계속 발표해서 이름 있는 삶을 살 수 있었겠죠. 그런데 저는 그런 삶을 원했던 적은 한 번도 없는 거 같아요. 부자가 되기를 원했던 적도 없고요. 다만 그때그때 필요한 돈이 있어 열심히 일했습니다.”

 

진보는 진보해야

지난해 9월 출간한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지금까지 25만 권이 넘게 팔렸다. 1만 권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라는 말을 듣는 시절에 25만 권은 초 대박이다. 아버지 장례식을 소재로 쓴 이 책을 구상한 것은 10년 정도 되었지만 쓰는 데는 두 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 

“2008년 아버님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10년 가까이 계속 구상을 하고 머릿속으로 계속 수정하여 고치고 아버님 돌아가시고 4,5년쯤 됐을 때 한 200매 썼다가 한 번 버리고 한 번 더 버리고 그런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제 이 책은 머릿속에서 거의 다 정리가 된 상태로 써서 쓰는 시간 자체는 오래 안 걸렸는데 10년 정도 준비 기간이 있었던 거죠.”

가볍고 코믹하게 쓰기 위해 애를 썼다. 책을 쓰는 두 달 내내 매일 두 병씩 소주를 마시며 자신은 물론 진지함 그 자체였던 부모를 ‘우스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돌아가신 아버님 실제 모습과 이 책에서 그려진 아버님 모습은 사뭇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진지한 사람입니다. 진지한 분인데 그거를 제가 코믹하게 만든 거죠. 그런데 실제로 부모님이 그렇게 싸우긴 하셨어요. ‘자네는 유물론자 아니네’ 맨날 이렇게…근데 아버지는 그거를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하신 거고 그런 말을 진지하게 하는 상황 자체가 저는 우스운 거죠. 그러니까 그거는 결국 그 시대와의 불화가 빚어낸 블랙 코미디일 것인데 그걸 포착해 낸 건 제 시선이지만 실제 모습은 진지한 분이셨죠.”


대학원 졸업할 때 찍은 가족사진에서 이 사람 부모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런 얼굴이 사회주의자의 얼굴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사는 사람의 표정이다. 이런 얼굴을 한 사람들이니 ‘자네는 사회주의자 아니네’ ‘자네는 산에서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같은 대화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주고받았으리라.     

-그 사진이 두 분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분은 사진 앞에서 웃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분은 카메라 들이대는 것 자체를 싫어하시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웃어야 된다는 이런 기본적인 생각이 없는 분들이셨습니다. 남에게 보이는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가공하는 게 1도 없는 분들이셨죠.”

<빨치산의 딸>이 온몸에 힘 가득 주고 쓴 ‘이념’과 ‘투쟁’의 기록이라면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힘 빼고 쓴 ‘사람’ 이야기다.    

“제 아버지 엄마가 보통 사람들보다는 좀 경직돼 있다고 느끼면서 살았거든요. 두 분에게는 일상이 아무 의미가 없고, 일상은 겨우겨우 살아내야 되는 거고, 입만 열면 하는 말이 조국 통일이고 민족 해방이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은 산에서 다 죽었고 찌끄래기들만 남아서 겨우 살아 있다고 하고. 그분들에게는 지금의 삶이 다 덤 같은 것이고 본인들의 마음은 여전히 그 산에 있는 거죠. 저는 어쨌건 그분들의 그런 자세를 평생 보고 살았잖아요. 진지하지 못한 거 못 참고, 가벼운 거 못 참고, 정신을 돌아보지 않는 거 못 참고… 뭐 그래서 못 참는 게 되게 많았어요. 아 이것도 부모님 밑에서 만들어진 무엇이겠구나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떨쳐내려고 굉장히 많이 노력했고요. 뭐 그런 결과물들이 이번 책에 조금은 반영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의 유쾌, 상쾌, 발랄함은 타고난 성정이라기보다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인 거다. 몇십 년에 걸친 노력 끝에 그런 재능을 익혔고 그 재능이 있어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나온 것이다. 몇 번인가 장편에 도전했다가 중도에 포기했다. 가리는 게 많고 따지는 게 많아 볼 줄 아는 인간형이 몇 가지밖에 되지 않았고 그래서 장편을 끌고 갈 힘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지난 30년 넘는 세월은 장편을 쓸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시간이었다.   


-<빨치산의 딸>을 쓸 때 정지아와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쓸 때 정지아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달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25살에 쓴 거고 이건 58살에 쓴 건데요. 사람이 그 세월을 견뎌냈으면 뭔가는 달라져야죠.”

-뭐가 달라졌을까요.

“많이 달라졌습니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것은 저에게 이데올로기적인 억압으로만 작용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대학 시절에 다 해결했고 특히 <빨치산의 딸>을 쓰고 나서는 제가 다 벗어났다고 생각했어요. <빨치산의 딸>만큼 널리 팔린 책이 안 나왔기 때문에 계속 ‘빨치산의 딸’ 정지아이긴 했습니다. 그걸 넘어서는 책을 써야 되는데 하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특별히 저를 힘들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제 살아보니까 제가 사람과 관계 맺는 게 되게 서툴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왜 서툴까? 저는 굉장히 솔직한 사람인데 사실은 솔직하지 못했던 거죠. 20대 때 제가 <빨치산의 딸>을 쓸 때 제 주변에 부모님이 빨치산인 것을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그것을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면 그 관계가 절대로 깊어질 수가 없는 거예요.”

여전히 진보의 가치를 이마에 써 붙이고 사는 사람들도 ‘진보의 원형질’ 같은 인물을 다루고 있는 이 책에 환호할지 모르지만 진보의 가치를 지향했지만 이제는 진보라는 말에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위안이 될 수 있겠다고 했더니 이렇게 말을 받았다.  

“진보가 진보해야 될 때인 거 같습니다. 실제로 저와 함께 했던 많은 분들 중에 당신들이 젊음을 바쳤던 그 이념으로부터는 멀어진 분들이 꽤 있죠. 그분들이 주로 대학이나 출판사 같은 데서 일하며 살고 있는데 그분들이 많은 거를 바꾸었거든요. 저는 이게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이거야말로 세상을 바닥에서부터 바꿔 나가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의 주 독자층은 386세대들이지만 MZ세대들도 적지 않다. MZ세대들이 자기 책을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저는 처음에 20-30대 독자들은 이 책을 안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한 가지 느낀 게 이 친구들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포나 거부감이 하나도 없어요. 누가 뭐래도 이것은 386세대가 만들어 놓은 장벽 제거의 힘이 아닌가 생각하고 그런 점을 생각해도 386세대가 너무 자괴감에 빠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꼴 못 보고 옳지 않으면 대들어야 했던 사람



가슴에서도 말이 나오고 머리에서도 말이 나온다. 거기에 유머 감각까지 갖췄다. 제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술 잘 사고 밥 잘 사서만이 아니었다. 1999년 민족사관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어느 날 그 학교에서 문학 담당 교사를 뽑는데 등단한 작가를 우대한다는 공고를 봤다. 반쯤은 호기심으로 원서를 냈는데 덜컥 합격이 되었다. 학생들에게는 인기 만점 선생님이었고 그때 제자들이 지금은 더없이 좋은 친구들이다.

그러나 그 학교 이사장에게 이 사람은 눈엣가시였다. 이사장은 독재자였다. 국어와 국사까지 영어로 강의하라고 지시했고 매일 아침 8시 조회 시간에 4절까지 애국가를 부르게 했다. 자기 지시 안 따를 거면 학교를 그만두라고 했다. 가리는 거 많고, 틀린 꼴 못 보고, 옳지 않으면 대들어야 했던 이 사람이 들려주는 그때 이야기는 사람 배꼽 잡게 하는 블랙 코미디였다.

“조회 중간에 이사장에게 끌려갔어요. 자기가 앉길래 내가 앉았거든요. ‘누가 앉으라고 그랬어!’ 그래서 ‘어머 그럼 누울까요?’ 이 양반이 대답을 못해 가지고 ‘아니 앉아!’ ‘근데 왜 반말 쓰십니까?’ 내가 그랬더니 ‘친밀하니까 그렇지’ ‘어머 그러면 나도 친밀한데 이제 나도 말 놓을까’ 막 이래 가지고 완전히 뒤집어졌어요. 그 양반이 사람 이름을 못 외우는데 3년간 제 이름을 외우고 조회 시간마다 얘기를 했대요. 이런 즐거운 일이 있었어요.”<폭소> 

적지 않은 월급도 아쉬웠고 무엇보다 자신을 선생님이 아니라 ‘정선생’이라 부르던 제자들과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쉬워서 한 2년 정도 더 다니고 싶었지만 민사고 교사 생활은 9개월 만에 끝났다. 민사고 시절 이야기는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이야기였는데 재밌기도 하고 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 싶어 기사로 쓰겠다고 했더니 선선히 그러라고 했다. 다만 그 이사장이 학교에서 한 푼도 가져가지 않은 청렴함은 갖춘 사람이었다는 것, 그때 민사고와 지금의 민사고는 전혀 다른 학교가 되었다는 것을 꼭 적어 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10년 전쯤 고 최인호 작가의 소개로 한 재벌회장의 자서전을 대필한 적이 있다. 자서전 집필을 위해 수십 차례 그 회장을 인터뷰했고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해외 출장에도 동행 취재했다. 그 재벌 회장은 솔직하고 때로는 대차게 구는 이 사람을 무척이나 아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의 마지막은 그리 아름답게 마무리되지 못했다. 자서전 역시 집필은 완성됐지만 출간되지는 않았다. 결국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문제였다.  


“밤 10시 구례로 내려가고 있는데 전화가 와요. 내일 4시까지 오라고. 그럼 나는 언제 구례 내려가서 쉬고 엄마 밥 차려주고 또 서울 갈 거예요? 그래서 몇 번 안 갔죠. 그리고 저는 그런 태도도 싫었던 거 같아요. 사람하고 약속을 정하는데 괜찮냐고 묻지를 않아요.”

-일방적이다 이 거죠?

“내일 시간이 됩니까? 이런 거를 묻지를 않아요. 그냥 부르면 오는 거야. 내가 시골에 엄마 모시고 있다는 말을 100번은 한 거 같은데… 그건 네 사정이고…이런 사람들이 장점도 있고 뛰어난 면도 있는데 자주는 못 보겠다. 그냥 이런 생각이 들어서 이제 점점 자주 깠다가…”

-까였군요

“괜히 그랬어요” (폭소)

두 번이나 모교에 자리를 잡을 뻔했다가 빨갱이가 싫고 무섭다는 재단 이사장의 반대로 실패한 이야기는 분명 서글픈 사연인데 그 이야기조차 폭소 만발하는 해학으로 풀어냈다. 

“그렇게 싫다는데 뭐라 할 거야. 제가 요즘 후회하잖아요. ‘회장님 저 안 무서워요’ 이렇게 나왔어야 됐는데 그때는 놀라 가지고 대응을 못했어. 정말 제 얼굴 보면서 ‘나는 빨갱이 무서워, 싫어’ 이러는데 좀 후회했잖아요. ‘회장님 저랑 술 한 잔 마셔봐. 안 무서워’ 이랬어야 되는데...” <폭소>

구례 낙향은 가장 잘한 선택

전남 구례에서 12년째 노모를 봉양하며 살고 있다. ‘그냥이’ ‘저냥이’ ‘애플’ ‘구글이’를 비롯한 고양이 4마리, ‘호랑이’ 치타’라는 이름의 개 두 마리가 함께 산다. 오전 10시, 저녁 6시 하루 두 번 올해 98살 되신 어머니에게 식사 챙겨드리고 반려견이랑 산책하고 나머지 시간은 멍 때리며 머릿속으로 작품 구상하는 게 주로 하는 일이라고 했다. 몇 가지 계절 채소를 집 앞 텃밭에서 직접 길러 먹는다. 노동을 견디지 못하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노동에 익숙하지 않다고 했는데 유난히 까만 손에서 노동의 흔적이 느껴졌다. 

어머님은 평생 체중이 45kg를 넘은 적이 없을 만큼 병약했다. 4년 동안의 빨치산 생활, 7년의 수감 생활이 건강에 도움이 될 리 없었다. 2008년 아버님이 타계하고 홀로 된 어머님을 누군가 돌봐야 했다. 딱히 서울 생활을 고집할 이유도 없었지만 서울을 떠나는 일은 두렵고 힘든 일이었다. 무엇보다 작가로서 잊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컸다. 초등학교 때 떠난 고향은 작가 정지아보다는 누구의 딸이라고 할 때 알아보는 사람이 더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과 과거 흔적이 강렬하게 남아있는 곳이었다. 이름은 남겼으되 부모는 평생 가난했고 그 가난은 이 사람에게 이어졌다. 아버지는 유산 대신 빚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윤춘호(논설위원)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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