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점령 미군, 조선인 전쟁포로 한국어 통역으로 긴급 배속

고승우 민언련 고문·언론사회학 박사 2023. 3. 2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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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관계 탐구 (08)] 루즈벨트, 소련 의식해 미군정 남한 민간행정 업무 준비 중단 시켜

[미디어오늘 고승우 민언련 고문·언론사회학 박사]

일본 정부는 1945년 8월6일, 9일 두 번의 미군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궁지에 몰리자 8월14일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고 미국과 영국에 통보했다. 8월15일 일본 천왕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쟁이 끝났음을 자기네 국민에게 알렸으며 일본 정부는 8월16일 일본군에 교전 중지 명령을 내렸다.

공식적인 일본의 항복 조인식은 1945년 9월2일 도쿄 만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맥아더 장군과 일본 외상, 일본군 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이뤄졌다. 맥아더는 미군이 서울에 진입해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다는 권한을 위임받은 것으로 결론짓고 있었다.

▲ 1945년 9월2일 일본 외무대신과 육군총사령관 등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도쿄 만에 정박한 미 전함 미주리호에 승선해 항복문서 조인식 참가하기 직전의 모습. 사진=위키미디어

그는 나아가 미군은 소련군이 이미 서울에 진입했다 해도 그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희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하지 중장은 인천으로 진입해서 소련군이 이미 그곳에 진주해 있을 경우 그들과 사전 접촉하도록 명령을 받았다(Message, CINCAFPAC to JCS (CM-IN-21116), 22 August 1945; Draft Message, JCS to CINCAFPAC, SWNCC Memorandum, Enclosure A to JCS 1483, "International Agreements as to Occupation of Korea," 24 August 1945; JCS Note by the Secretaries advising that JCS 1483 was approved and the message dispatched on 1 September 1945, all in Combined Civil Affairs Committee (CCAC) folder 014 Korea (8-28-45)* Sec. 1, RG 218, Box 146, NA).

1945년 8월29일 맥아더는 일본 정부에 전문을 보내 미군의 한반도 상륙이 9월 7일 이뤄진다고 통고했다<History of USAFIK, pp. 60-61.>. 그는 이어 일본 정부는 한반도 남부에 주둔하는 일본군 사령관에게 8월 31일까지 하지 중장을 접촉해서 항복과 관련한 지침사항이 하지 장군 부대에 전달되도록 조치하라고 명령했다.

맥아더의 전문은 9월1일 서울에 주둔중인 일본군 사령관에게 전달되었고 하지 중장은 그 때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하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 이어 하지 중장 부대의 선발대가 9월4일 항공기를 타고 한반도로 향했다.

미 점령군이 남한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항복문서 조인식은 1945년 9월9일 오후 4시 서울 조선총독부 중앙 회의실에서 열렸다. 아베 노부유키 총독은 이날 미군 제24군단 존 하지 중장·제7함대 T.C. 킨 케이드 해군제독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조인식 직후 조선총독부 건물에 걸려있던 일장기가 내려가고 미 점령군에 의해 성조기가 게양됐다.

당시 서울 주재 소련 영사는 소련과 일본이 전쟁 상태였지만 집무를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 점령군 선발대는 소련과 사전 접촉을 하라는 맥아더의 지시를 무난히 수행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 항복이 미 점령군의 한반도 진입 계획이 수행되기 이전에 이뤄졌지만 그 맥아더의 작전계획에 따라 하지 장군 부대와 수송 장비 운송 등이 당초 계획 일정보다 완료되었다.

미 정부 종전까지 한반도 전문가, 민간행정 업무 담당 부대 배치한 적 없어

미군의 남한 점령이후 하지 중장 부대는 맥아더가 일본 항복 직후 취했던 것과 동일한 조치를 시행했다. 한반도가 일본에 강점되었다는 역사적 사실보다 한반도가 일부의 식민지라는 점에 착안해 대책이었다. 당연히 미 24군단 지휘부에는 군정을 실시할 능력을 갖춘 전문가나 한반도 전문가가 전무했다. 이는 미국 정부가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반도 전문가나 민간행정 업무를 담당할 부대를 훈련하거나 배치한 적이 없었기 때문 이었다(The initial correspondence on initiating civil affairs preparations for Korea, and the early studies are reprinted in FRUS, 1944, V, 1190, 1225-29, and 1239-41. Henderson's comment is in Gregory Henderson,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68), p. 415. Kinney's speculations were related to me in a series of informal conversations in 1975 and 1976. Dr. Michael E. Macmillan of the East-West Center in Honolulu, Hawaii brought to my attention documentation on Kinney's postwar views).

이와 관련해 미 국무부 직원으로 한반도에 대해 경험이 풍부했던 조지 핸더슨은 한반도 점령이후 미 군정청이 시행할 민간행정 업무에 대한 안내서에 대한 작업을 윗선에서 중단시켰다고 말했다. 또한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미군 정보부에서 동아시아 문제 조사 분석관으로 근무했던 로버트 키니는 안내서 작성 작업을 중단시킨 것은 루즈벨트 대통령이라고 추정했다.

키니 분석관은 그 이유에 대해 '미국이 한반도 점령에 대비한 준비 작업을 할 경우 미국이 한반도에 대해 욕심을 내는 것으로 스탈린이 의심해서 한반도를 상대로 선제적 군사행동을 취할 것을 우려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이 한반도에서 민간행정 업무에 대해 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https://press.armywarcollege.edu/cgi/viewcontent.cgi?article=1734&context=parameters).

군정 계획을 시작할 핵심 장교를 육성하기 위해서 10군단 대공포병사령부가 군정 사령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지정되었지만 어떤 소속 장교도 민간행정 업무에 대한 훈련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한반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10군단 소속 민간행정 업무장교 20 명이 후에 하지 사령부로 전출되었다.

▲ 1945년 8월 태평양전쟁 오키나와 전투 이후 포로로 잡힌 일본군 소년병 포로 2명이 미군의 심문을 받고 있다.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상륙작전에 앞서 14-17살 소년병 1,780명을 동원해 전선에 투입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서울 점령 미군, 조선인 전쟁포로 6명 한국어 통역사로 24군단에 배속시켜

일부 민간행정 업무 장교가 일본에서 한반도로 전출되었지만 하지 부대가 인천항에 상륙하기까지 한반도에 도착하지 않았다. 한반도에 배속 예정인 부대에서 한반도 특성에 맞는 민간행정 업무에 대한 교육은 1945년 9월까지 실시된 적이 없었다.

그 결과 미군의 한반도 점령 초기라는 중차대한 시기에 미 군정청 업무는 훈련받은 민간행정 업무 전문 장교가 아니라 전투 부대 군인들에 의해 수행되었다(History of USAFIK, p. 27; E. Grant Meade,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New York: King's Crown Press, 1951), pp. 47-51; Wilson Owen Henderson, "To the Kwangju Station," Southwest Review, 35 (No. 4), 233; Donald S. MacDonald, "Field Experience in Military Government: Cholla Namdo Province, 1945-1946," in Carl J. Friedrich and Associates, American Experience in Military Government in World War II (New York: Rinehart and Company, 1948), p. 366; Duncan Sinclair, "The Occupation of Korea--Initial Phases, Military Review, 27 (July 1947), 34-35). 더욱 심각한 것은 미 군정청에 한국어를 전공한 미군은 한 명도 없었다.

미 군정청은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는 미군을 찾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오키나와에 주둔했던 미군 가운데 한국어 통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미군은 섬 전체를 뒤져 한국어를 할 수 있는 미군을 찾다가 결국 조선인 전쟁포로 6명을 가석방해서 24군단에 배속시켰다(History of USAFIK, ch. 4, 35).

더욱 심각한 것은 한반도 점령 미군이 사용할 정책 지침이 존재하지 않았던 점이다. 하지 중장은 한반도 독립이나 한반도를 일본 점거에서 분리시키는 작업, 한반도 국내 정치와 같은 핵심 사안에 대한 지침을 전혀 받지 못했다. 마닐라에 주둔중인 맥아더도 더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는 8월22일 합동참모본부에 24군단의 한반도 점령 지침에 대한 정보를 보내달라고 긴급 요청했다. 미 국무·육군·해군 삼부조정위원회(SWNCC)는 답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합동참모본부에 '미 정부는 아직 한반도 민간행정 업무 특성과 관련해 합의된 방침이 없다'고 밝혔다(CINCAFPAC Message CX 35718, 22 August 1945 in folder CCS 386.2 Japan (4-9-45) Sec. 4, RG 218, Box 136, NA; "Draft Memorandum to the Joint Chiefs of Staff," enclosure to SWNCC 176, "International Agreements as to the Occupation of Korea," 22 August 1945 in ABC 014 Japan (13 April 44) Sec. 17A, RG 165, Entry 421, Box 31, NA.). 나흘 뒤 마닐라의 미국 총영사관은 미 국무부에 맥아더 장군은 한반도와 관련해 어떤 명령도 아직 받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 1945년 6월 오키타나와 부근 오쿠쿠 섬에서 미군에 잡힌 일본군 전쟁포로들. 미국은 일본군에 끌려갔던 조선인 일부를 한반도 점령 미군에 한국어 통역사로 배속시켰다. 사진=위키미디어

미 정부, 한반도 점령 미군이 사용할 민간행정 업무 정책 지침 전무

8월18일 하지 중장은 미 국무부에 한반도 점령에 대한 정치적 지침을 설명할 책임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에 따라 머렐 베닝호프가 파견되어 9월 3일 24군단이 한반도로 출발하기 전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머렐 베닝호프는 미 군정청 주한 정치고문을 지냈다.

베닝호프가 전달한 지침은 불충분해서 하지 중장의 한반도 점령에 대한 미국 정책 파악에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하지 중장이 한반도를 점령한 일주일뒤 베닝호프는 미 국무부에 전문을 보내 미 군정청 본부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는 정치적 지침이 전무한 것이라고 보고했다.

실제 미 정부는 24군단 선발대가 서울에 도착한 뒤 한 달이 더 지난 1945년 10월17일까지 미 군정청의 한반도 점령과 관련한 민간행정 업무에 대한 초보적 지침도 보내지 않았다<Telegram, "The Consul General at Manila (Steintorf) to the Secretary of State," 26 August 1945 in FRUS, 1945, VI, 1041; History of USAFIK, p. 64; letter, "The Political Advisor in Korea (Benninghoff) to the Secretary of State," 15 September 1945, in FRUS, 1945, VI, 1052; JCS Message CM-OUT-55336 "JCS to CINCAFPAC, Manila," 25 August 1945, in folder OPD 014.1 TS Sec. IV, Case 75, "Assignment of Liaison Personnel," RG 165, Entry 419, Box 108, NA; "Basic Initial Directive to the Commander in Chief, U.S. Army Forces, Pacific, for the Administration of Civil Affairs in those areas of Korea Occupied by U.S. Forces," transmitted 17 October 1945, in FRUS, 1945, VI, 1074-93.>.

결국 한반도 미 점령군이 당면한 문제는 그들이 점령할 한반도에 대해 어떤 정보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한반도에 대한 몇 가지 정보는 1945년 4월 발간된 미 육해군 합동정보 검토보고서 뿐이었다. 이 자료는 일부 유용한 내용이 있었지만 피상적인 것에 그쳤다.

단지 오키나와에서 붙잡힌 조선인 전쟁포로를 심문했을 때 일부 정보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한반도에 대한 상황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맥아더는 미군 점령이전에 사고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한반도에 대한 공중 정찰을 금했다.

그러나 당시 촬영한 한반도 공중사진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24군단 지휘관이 오키나와에 있는 미 육군항공대 소속 정찰비행부대를 설득해 몇 차례 항공촬영을 위해 출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결과 이들 사진은 전투 작전에는 부적합했지만 점령군의 배치 계획에 유용했다.

한반도 점령군으로 지정된 24군단이 출항준비를 하는 동안 태풍이 계속 불어 출발이 늦어지다가 9월5일 24군단 선발대가 출발해 9월 8일 인천에 도착했다(56. History of USAFIK, pp. 21-22, ch. 4, 35; Taylor, "Administration and Operation of Military Government," p. 357). 북위 38도를 경계로 미군 점령군이 진주를 시작한 한반도는 강력하고 억눌린 민족주의적 감정과 심각한 사회적, 정치적 분열을 겪고 있었다.

미국이 한반도를 일본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상태로 보거나 유럽에 관심이 더 큰 상태였지만 실제 한반도에서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교차하고 있었다. 한반도에 진군한 미국인들은 대단히 예민하고 복합적이며 낯선 분위기를 경험해야 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꾸려나가면서 많은 오류를 저질렀다. 그것은 일부는 교만에서 비롯되었지만 대부분 무지나 자신들의 책무에 대한 전망이나 준비부족의 결과였다.

하지가 재임하는 기간 동안 미국은 유엔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제주 4.3이 발생해 주민 3만 여 명이 살해되었다. 그는 1948년 8월 27일 이임했고 간은 해 소련 주력군도 북한에서 철수했다.

미군의 점령이 해를 넘기면서 미국은 한반도 신탁통치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점과 민간행정에 대한 준비 부족, 부적절한 미군 점령군 사령관 선출 등의 과오로 인한 심각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45년 9월 미군의 한반도 점령이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한국 전쟁으로 가는 과정의 시작 이었다( https://press.armywarcollege.edu/cgi/viewcontent.cgi?article=1734&context=parame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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