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내전 시기 ‘전쟁같은 절교’

한겨레 2023. 3. 2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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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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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제목의 영화 한 편이 관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올해 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8개 부문 9개 수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지만 무관으로 내려온 작품 <이니셰린의 밴시>다. 익숙한 단어들의 조합이 아니다 보니 좋은 평가 속에서도 제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니셰린’(Inisherin)은 아일랜드어로 ‘아일랜드섬’이라는 뜻이다. ‘밴시’(Banshee)는 켈트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아일랜드 고대 전설 속 정령으로, 비명을 지르거나 울부짖으면서 가족의 죽음을 예고한다고 전해진다. 그러니까 ‘이니셰린의 밴시’란 ‘아일랜드섬의 죽음을 알리러 온 정령’이라는 뜻이다. 이 매혹적인 작품은 결국 서러운 죽음들에 대한 이야기다.

“더 말 걸면 내 손가락을 자르겠어”

영화는 아일랜드 서쪽에 있는 가상의 섬 이니셰린을 배경으로 한다. 때는 1923년 4월. 아일랜드 본섬에서는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둘러싸고 독립파와 현실 타협파 사이의 내전이 한창이다. 이니셰린은 이 전쟁의 폭발음이 일상적으로 들려올 정도로 본섬에 가까이 붙어 있는, 작고 척박하지만 아름다운 섬이다. 얼마나 작은가 하면 성당도 하나, 술집도 하나다.

소박한 촌부 ‘파우릭’(콜린 패럴)은 오늘도 오후 2시에 맞춰 오래된 친구인 ‘콜름’(브렌던 글리슨)에게 술 한잔을 청하러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콜름은 문을 닫고 대꾸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콜름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파우릭은 그를 쫓아다니며 이유를 묻는다. 돌아오는 대답은 더 황당하다. “이유는 없어. 그냥 자네가 싫어진 것뿐이야.” 그리고 덧붙인다. “나에게는 생각하고, 작곡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시간이 필요해. 자네의 그 지루한 이야기들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파우릭은 실의에 빠진다. 따뜻하고 즐겁기만 했던 일상의 순간들이 콜름에게는 시간을 낭비하는 멍청한 소음의 연속이었다니. 하지만 인생에 소중한 것이라고는 동생 ‘시오반’(케리 콘던)과 당나귀 ‘제니’, 그리고 콜름뿐인 파우릭은 그를 쉽게 놔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 파우릭이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다. 축 처진 어깨에 슬픈 눈을 하고는 콜름의 주위를 맴돌며 말을 걸 기회를 노리는 것.

그런 파우릭이 지긋지긋한 콜름은 극단적인 선언을 한다. “한번만 더 나에게 말을 걸거나, 말을 걸기 위한 시도를 한다면, 그때부턴 내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어.” 파우릭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실제로 콜름이 손가락을 잘라 파우릭의 집 문 앞에 던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게 파우릭을 밀어낸 콜름은 드디어 확보한 ‘의미 있는 시간’ 속에서 노래를 한 곡 쓴다. 그 노래의 제목이 바로 ‘이니셰린의 밴시’다.

하나는 밀어내고 하나는 집요하게 따라붙는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그 목적을 잃고 격렬해진다. 아끼는 사람을 되찾겠다는 파우릭의 노력은 오히려 콜름의 자해를 초래할 뿐이고, 음악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 파우릭과 헤어지고 싶었던 콜름은 손가락을 자르면서 더 이상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게 된다. 두 사람이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일랜드 출신 감독 마틴 맥도나는 “이별의 슬픔에 대해 다루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명백하게 아일랜드 내전을 참조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이별’이란, 그리고 콜름의 절교 선언 후 벌어지는 두 친구 사이의 총성 없는 전쟁이란, 바다 건너 아일랜드 본섬에서 펼쳐지고 있는 ‘민족상잔의 비극’에 대한 냉정하지만 뜨거운 알레고리다.

이 전쟁은 아일랜드 독립이라는 같은 목표를 꿈꾸던 ‘친구들’ 사이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었다. 이 싸움을 촉발한 건 영국이라는 거대한 힘이었지만, 일단 시작된 내전은 ‘우리 중 하나’가 절멸할 때까지 지속된다. 그 과정에서 아일랜드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파우릭이 사랑하는 존재들을 잃고, 콜름이 손가락과 집을 잃고, 이니셰린이 ‘아일랜드섬’의 상처 입은 영혼을 체현하는 어린 청년을 끝내 잃고 말 듯이 말이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국 넘어선 아일랜드, 그리고 회상

영화의 마지막. 끝을 알 수 없는 싸움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풍경을 등진 채 두 사람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콜름이 파우릭에게 말한다. “본섬에서 총성이 안 들린 지 이틀쯤 됐네. 전쟁이 끝나가는 모양이야.” 그러자 냉담해진 파우릭이 답한다. “조만간 다시 시작할걸. 어떤 일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법이니까.”

아일랜드 내전은 1923년 5월24일에 끝났다. 이 전쟁으로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던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은 궤멸됐다. (우리에겐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라는 훌륭한 주석이 있다.) 그러나 1972년, 영국이 북아일랜드인을 학살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아일랜드공화국군은 부활한다. (IRA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복잡한 마음에 대해서는 유투(U2)의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Sunday Bloody Sunday)를 주석으로 달 수 있을 것이다) 둘 사이의 갈등이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파우릭의 말은 그래서 아프다. 우리는 ‘서로의 당나귀를 위하고 개를 돌봐주는 마음’이 아일랜드인들의 출혈을 막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21세기 들어 고속성장을 이룬 아일랜드는 1인당 지디피(GDP) 세계 3위를 기록하면서 경제적으로 영국을 앞선 지 오래고, 덕분에 ‘극영’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시대에 마틴 맥도나는 1920년대 아일랜드 내전으로 돌아갔다. 브렉시트 이후 다시 고조되고 있는 아일랜드와 영국령 북아일랜드 사이의 긴장 때문일 수도 있고, 그래서 지금의 아일랜드를 이루고 있는 정체성이 어떤 폭력의 역사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아일랜드 영화’가 아일랜드인과 그 역사를 다루는 방식을 놓고 더블린에서는 미묘한 긴장감이 돈다고 한다.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아일랜드인 감독이 만든 <이니셰린의 밴시>는 생각보다 훨씬 불온하고 위험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런 긴장감은 한국인에게도 낯설지 않다.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와 내전을 거쳐 “눈 떠보니 선진국” 운운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얼마나 스스로에 대해 성찰할 수 있을까.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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