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환자가 치매에 대해 쓰다 [여여한 독서]

김이경 2023. 3. 25.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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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
웬디 미첼·아나 와튼 지음
조진경 옮김
문예춘추사 펴냄
ⓒ한성원 그림

 

지갑을 깜박해 다시 집에 돌아오고 냄비를 태워먹고 냉장고 문을 열고 우두커니 서 있는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난다. 아무리 건망증과 치매는 다르다지만 이런 일이 거듭되면 치매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치매 진단에 많이 쓰는 ‘하세가와 척도’라는 게 있다.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인가요? 암산으로 100에서 7씩 계속 빼보세요’ 같은 문항으로 이루어진 검사인데, 암산에 약한 나는 자꾸 막히는 계산에 치매를 걱정한다.

진단법을 만든 일본의 치매 전문의 하세가와 가즈오에 따르면, 노령은 치매의 주요인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늙으면 걸리기 쉬운데 치매의 권위자인 그도 88세에 치매 진단을 받았다. 그러고서 “이제야 비로소 치매에 대해 알게 되었다”라며 90세에 〈나는 치매 의사입니다〉(이노쿠마 리쓰코 공저, 라이팅하우스 펴냄)라는 책을 썼다. 치매 환자가 책을 쓰다니 가능한가 싶지만 사실 이런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을 쓴 웬디 미첼은 20년 동안 영국 국민의료보험에서 팀장으로 일하다 58세에 치매 진단을 받은 초로기 치매 환자다. 웬디 미첼은 진단받고 4년째 되던 해에 첫 책을 썼고, 8년이 지난 2022년에는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이란 책을 또 펴냈다. 두 책 모두 아나 와튼의 도움을 받아 함께 썼는데, 읽어보면 알 수 있듯 그의 기록이 없이는 불가능한 책이다. 그러니까 치매 환자도 생각을 하고 글을 쓸 수 있다!

책들을 읽다 보면 치매에 관한 통념이 뿌리째 흔들린다. 치매는 머리를 쓰지 않거나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 걸릴 거라는 흔한 오해부터. 평생 의사로 일하고 아흔이 넘어서도 강연을 다니는 하세가와는 물론이요, 미첼 또한 활발히 사회생활을 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며 술 담배도 안 하는 건강한 생활 습관을 가진 두 딸의 엄마였다. 그런 사람이 58세의 이른 나이에 치매에 걸린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많은 병처럼 치매 또한 발병 요인은 여러 가지이며 환자가 뭘 잘못해서 걸렸다는 식으로 단순히 말할 순 없다. 또한 치매에 걸리면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통념도 미첼 앞에선 힘을 잃는다. 그는 치매에 걸리고도 8년이나 혼자 살면서 책을 두 권씩 썼으니 말이다. “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적어도 깜짝 놀라기를 바란다”라는 미첼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정말이지 나는 깜짝 놀랐으니까.

“책을 읽고 깜짝 놀라기 바란다”

책을 읽기 전엔 만약 내가 치매 진단을 받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게 얼마나 무식하고 어설픈 생각인지 안다. 미첼은 ‘치매가 있어도 좋은 삶’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반문한다. “치매로 인해서 도대체 왜 우리 삶이 멈춰져야 하는가?” 다른 병과 마찬가지로 치매에 걸렸다고 해서 삶이 갑자기 끝장나는 것은 아니다. 끝나기는커녕 미첼은 이전에 살던 대로 혼자 살면서 글을 쓰며 삶을 꾸려간다.

물론 쉽진 않다. 먹는 것 하나만 해도 음식을 조리하고,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고, 심지어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을 인지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래서 부엌은 난장판이 되고 즐기던 음식은 멀어지고 접시의 음식은 바닥으로 떨어지기 일쑤이지만, 그럼에도 미첼은 느리고 단순한 자기만의 방식으로 식사를 해결하며 자신의 삶을 즐긴다. 혼자 사는 그에겐 이걸 이렇게 먹어라, 왜 안 먹느냐고 지적하는 사람이 (지적받는 스트레스가) 없어서다. 그는 자신과 여러 환자들의 경험을 토대로 환자를 돌보는 이들에게 말한다. 애써 준비한 음식을 환자가 먹지 않아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또 조금밖에 먹지 못한다 해도 함께하는 식사 시간의 즐거움을 누리도록 도와주라고. 식단이나 영양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여전히 사람들 속에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확인이기 때문이다.

흔히 치매는 기억을 잃는 병이라고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희미해지는 기억 못지않게 감각의 왜곡이 환자를 괴롭힌다는 점을 강조한다. 흰 접시 위에 놓인 흰살 생선을 먹기 힘든 것도, 반들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발을 들이기 힘든 것도, 사이렌 소리에 공포를 느끼는 것도 모두 치매로 인한 감각기관의 문제 때문이다. 만약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 또한 (미첼이 성토하는 무감각한 의사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처럼, 빤히 보이는 음식을 먹지 못하거나 걸음을 떼지 못하는 치매 환자를 보며 치매에 걸리면 판단력이 없어지고 바보가 되는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제대로 알고 대응법을 마련하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재단하고 업신여기거나 동정했을 것이니, 정말 어리석은 건 누구인가.

미첼은 치매에 걸린 뒤 자신이 겪은 내면의 감정 변화에 대해, 엄습하는 우울과 슬픔, 불안에 대해 솔직하게 토로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과거는 흐릿해지고 미래는 아득하여 오로지 ‘지금 여기’에 집중하면서 얻는 행복감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치매에 걸린 사람이 다 그처럼 씩씩한 것은 아니다. 치매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다 다르듯 환자들 역시 증상도 내면도 다르다. 그래서 조기진단이 필요하다.

네덜란드의 노인 심리학자이자 치매 환자의 가족으로 40년을 살아온 휘프 바위선은 〈치매의 모든 것〉(장혜경 옮김, 심심 펴냄)이란 책에서, 치매가 낫는 병은 아니지만 조기진단은 환자의 상태를 개선하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어떤 치매인지 알고 적절한 치료를 하면 악화를 늦추고 고통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늙든 젊든 누구나 치매에 걸릴 수 있고 누구나 치매 환자를 돌보는 처지에 놓일 수 있다. 책을 읽고 안다 해서 이 고통이 줄지는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을 나누는 것뿐이다. 나눌 수 있다는 믿음, 그게 우리가 고통을 알아야 할 이유이고 고단한 인생을 사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김이경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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