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없는 물과 맛있는 물...물과 술 이야기 2[뉴트리노의 생활 과학]
지난번에는 아무 맛이 없는 무미(無味)의 물을 공부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물에는 맛없는 물뿐 아니라 맛있는 물도 있습니다. 바로 술이지요. 술은 에탄올, 정확하게는 에틸 알코올(CH3CH2OH)이 함유된 물입니다. 비슷한 사촌 알코올인 메탄올, 즉 메칠 알코올(CH3OH)은 화학적 구성으로는 더욱 단순한 형태이지만 인체에 독성이 있어 마시면 눈이 멀거나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실험실 알코올이나 공업용 알코올을 술 대신 마시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술의 기원은 자연 상태에서 우연히 일어난 당(糖) 분해 또는 당 발효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상상해봅시다. 숲 속에서 푹 익은 과일 몇 개가 포식자의 입을 피해 살아남습니다. 혹은 벌들이 채취한 꿀이 벌집에서 흘러나와 어딘가에 고입니다. 여기에 온도와 습도가 맞아떨어지면 알코올 발효가 일어나면서 천연 술이 빚어집니다. 원시림에 사는 유인원이 이 냄새에 끌려 처음 마셔보고 취하는 장면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술의 시조에 해당하는 포도주와 꿀술의 탄생은 아마도 이런 신화와 민담의 어디쯤에서 나왔을 거라고 전문가들은 짐작합니다. 과일과 곡물의 자연 발효에서 채취한 신비의 물, 맛있는 물을 인위적으로 제조하려는 과정에서 술이 인간 세상에 등장했다는 거죠.
식물 열매의 주성분인 탄소 화합물, 즉 탄수화물은 녹말 등 다당(多糖)류와 설탕, 맥아당 등 이당(二糖)류, 그리고 분자 1개짜리 단당(單糖)으로 나뉩니다. 당 발효는 미생물이 당을 유기산이나 이산화탄소, 수소기체 등의 기체로 분해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 가운데 사람처럼 단 것을 좋아하는 단세포 미생물인 효모가 포도당을 먹고 이를 에탄올과 이산화탄소 기체로 분해하는 과정이 당 발효 중 하나인 알코올 발효입니다. 산소가 필요 없는 무산소 호흡 과정입니다. 당이 알코올로 바뀌는 이 신비한 변화는 자극적인 냄새와 감각을 일시 마비시키는 특유의 효능으로 인해 사람을 비롯한 동물들을 매혹합니다. 과학자들의 기록에는 초파리부터 코끼리까지 술에 취해 해롱거리는 모습의 관찰 일지들이 넘쳐납니다. 이처럼 알코올의 유혹이 강한 것은 여기에 당분이 있다는 강력한 먹이 발견 신호를 주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번뇌를 잊게 만드는 뇌 마취 효과보다는 달콤한 먹잇감이 부근에 있다는 원초적인 생존 욕구가 알코올 선호의 출발인 셈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술이 광범위하게 퍼진 것은 여러 장점이 있어서입니다. 술 안에 있는 에탄올, 즉 알코올이 해로운 세균과 기생충을 없애주기 때문에 깨끗한 물이 부족한 곳에서는 물 대신 술을 마셨습니다. 식욕을 자극하고 음식 재료의 단백질 등 영양소에 맛과 향을 더해주기도 하죠. 적당한 양을 마시면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을 낮춰주는 효능도 발휘합니다. 그래서 술 마시는 인간, ‘호모 임비벤스(Homo Imbibens)’는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맥주는 고대 수메르나 이집트의 벽화에서 발견되는 오래된 술입니다. 포도주 역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상류 지역의 고원에서 출발한 옛 술입니다. 고대와 중세에서 초기 술은 신을 섬기거나 왕족 등 특권층의 유흥용으로만 허락된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농사가 대규모로 보급되면서 술 제조법도 널리 퍼졌고, 서서히 일반 백성도 술을 기호품으로 즐기게 되었습니다. 향정신성 약품으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술에는 독한 술과 약한 술이 있습니다. 약한 술이 먼저 탄생했습니다. 왜냐하면 효모가 먹고 남은 부산물인 에틸알코올의 농도는 18%가 한도이기 때문입니다. 알코올이 더 진해지면 효모 스스로 용액 속에서 살지 못하고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천연발효주인 포도주, 맥주, 청주 등은 더 독하게 만들려면 증류를 해야 합니다. 가열해서 수분은 날리고 알코올 농도를 높이는 거죠. (전통) 소주, 고량주, 보드카, 위스키, 브랜디 등 독주는 알코올 함량을 40~70%까지 강화한 술입니다. 이렇듯 강화 독주는 짜릿함을 안겨주지만 천연 상태의 술보다 훨씬 자극이 심하기 때문에 위, 장 같은 소화기관이 약하거나 알코올 분해 효소가 적은 이들은 희석해서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술은 몸에 약과 독을 모두 줍니다. 위와 장의 표면에서 흡수된 에틸알코올은 뇌에서 도파민, 세로토닌 같은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해 중추신경을 자극합니다. 진정제나 약한 마취제 효과를 냅니다. 술을 마시면 졸음이 오고 긴장이 풀리면서 느긋하고 약간 유쾌한 상태가 됩니다. 동시에 시상하부를 자극해 교감신경을 활성화합니다. 아민과 아드레날린 분비가 촉진돼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서 얼굴이 붉어지거나 몸에 땀이 납니다. 에탄올의 삼투 효과 때문에 콩팥에서 소변을 더욱 많이 배출시킵니다. 알코올 섭취가 더 많아지면 말을 더듬거나 몸을 가누지 못하는 주사(酒邪)를 부리게 됩니다. 뇌의 판단 기능을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
몸속에 에탄올의 농도가 짙어지면 인체는 필사적으로 이를 분해해서 몸 밖으로 내보내려 애씁니다. 알코올 탈수소 효소가 에탄올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아세트알데하이드(CH2CHO)는 독성 물질로 쌓이면 큰 해악을 끼칩니다. 더욱 폭음하면 인체 속 화학 공장인 간에 과부하가 걸려서 간이 망가집니다. 술을 자주 마시면 알코올에 대한 내성이 생기면서 점점 많은 양의 술을 마시게 됩니다. 알코올 중독 상태에 빠지는 거죠. 앞부분 글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분량이 문제라고 말씀드렸죠. 설탕과 소금은 적어도 넘쳐도 독이 됩니다. 딱 적정 용량만 써야 약이 되는 겁니다. 알코올 역시 같은 중용의 원리가 적용되는 성분입니다. 독술 아닌 약술로 승화시키는 게 지혜입니다.
노성열 기자 nosr@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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