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배 책임 얽힌 징용배상, 이젠 일본이 ‘양보’할 차례
이태진의 근현대사 특강
한·일 양국 간 문제에는 처음부터 태평양전쟁 전승국인 미국의 역할과 영향이 컸다. 1945년 11월 트루먼 대통령은 절친한 친구 에드윈 폴리를 대일배상사절단 단장으로 도쿄에 파견했다. 그는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 만주 등지를 둘러보고 귀국한 뒤 일본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못하도록 일본의 과도한 공업설비를 제거하여 침략받은 나라들에 옮겨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한국에 대해서도 배상청구의 일부로서 “조선의 자원과 인민을 착취하기 위해 사용된” 일본의 산업 설비를 남조선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했다. 카이로 선언의 정신을 준수한 것이다.
구보다 “36년간 통치는 은혜 베푼 것” 망언
1946년 미 군정청은 대일배상정책에 따라 ‘특별경제위원회’를 설립하고 한·일 양측의 배상요구 리스트를 작성하였다. 남조선의 요구액은 492억 5428만 엔, 일본의 요구액은 88억 939만 엔, 이에 따라 일본은 차액 403억 6488만 엔을 남조선에 줄 의무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의 이런 자세는 1947년 8월까지 지속하였다. 1946년 8월 13일 미 군정은 배상 이론 개발을 위해 남조선과도정부에 ‘대일배상문제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의 조사 자료를 비롯한 금융자산 주요 자료를 확보하였다. 1948년 1월 위원회는 대일배상요구 총액을 1조 4267억 8601만 9675엔으로 계산하였으나 최종 요구액은 총액 410억 9250만 엔으로 정리했다. 일제 36년간의 피해에 대한 광복 후 우리의 의식을 보여주는 숫자들이다.
한편 미국은 일본의 신헌법 공포 2개월 뒤인 1946년 11월 3일 새로운 상황 판단을 내린다. 일본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엄격한’ 대일배상 정책을 그대로 실시하면 미국의 일본 점령비용 증대로 미국의 납세자 부담이 늘어나는 결과가 될 것이란 판단이었다. 당시 미국은 유럽에도 전후 복구비로 막대한 돈을 투입하고 있었다. 1947년 1월 기업인으로 독일에서 민간 주택 복구에 공을 세운 클리퍼드 스트라이크를 단장으로 하는 ‘대일배상특별조사단’이 일본으로 왔다. 조사단은 현지 실상을 살피고 2월 18일 맥아더 사령관에게 ‘납세자 논리’를 담은 1차 보고서를 제출하고, 1948년 3월 2차 보고서에는 ‘냉전 논리’를 보탰다. 냉전체제가 굳어가는 가운데 일본의 배상 부담을 줄이는 것이 극동 전체의 이익이라고 하였다. 같은 해 8월 ‘극동위원회’(1946년 연합국 최고사령부 대신 발족)가 남조선은 극동위원회의 구성원이 아니므로 배상 배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남조선은 일본인이 남기고 간 재산의 취득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했다. 초기의 엄벌주의가 뒤집히는 순간이었고, 타의에 의한 양보를 한국이 감수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9월 22일 국무장관 고문 덜레스는 한국 정부에 일본과의 회담을 종용하였다.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48개국 대표들이 ‘대일평화조약’에 서명하였다. 조약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중에 입은 재산상의 피해에 대한 청구만 허용하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은 논외로 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엄혹한 냉전체제의 현실 앞에 이승만 정부는 고액 피해액 방안으로 버텼다.
일, 한국에 줘야 할 돈으로 경제 부흥
1958년 4월에 시작한 제4차 회담은 1960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일본은 대한민국 제2공화국 출범을 기회로 ‘경제 협력’ 논리로 타결을 노렸다. 그간 미국의 배려로 크게 성장한 경제력을 우위 확보에 활용해보려는 변화였다. 장면 정부는 이승만 정부의 방침을 견지하여 23억 배상금을 요구하였고 회담은 결렬됐다. 1961년 11월 미국을 다녀오던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 도쿄에서 이케다 하야토 수상을 만났다. 박 의장은 “한·일 양국의 명예롭지 못한 역사를 들춰내기보다 공동의 이념과 목표를 위해 과거사를 접겠다”고 발언하였다. 한국이 능동적으로 표명한 ‘통 큰’ 양보였다.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작성되었다. 무상 3억 달러를 10년간 지불하고 연리 3.5% 7년 거치 20년 상환 조건의 유상 2억 달러와 1억 달러 이상의 민간 차관을 제공한다는 청구권 해결의 원칙이 합의되었다. 야당과 학생들의 반대 시위로 2년여를 끌다가 1965년 2월 시나 에쓰사부로 외상이 방한하여 ‘기본조약’ 초안 작성이 이루어지고 6월에 국교 정상화의 한일협정이 조인되었다. 한국 측의 청구액은 현저히 줄었다. 합계 5억 달러란 액수조차 현금이 아니라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으로 제공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극동 정책에 따라 전후 경제 번영을 이루었다. 수교 협상 과정에서 한국은 청구액을 크게 낮추는 양보를 했다. 한국이 일본에서 받은 청구권 자금을 경제개발의 종잣돈으로 삼았다는 통념이 퍼져 있지만, 일본 역시 한국에 줘야 할 돈으로 경제 부흥에 요긴하게 썼던 것이 아닌가. 1965년 한일협정은 다행히 청구권과는 별개로 ‘기본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라는 문구에 민족의 한을 담았다. ‘이미’의 시점이 양국 간 다툼의 대상으로 남았지만, 이는 청구권과는 별개로 식민지배 문제를 재론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1990년대 이래 ‘한국병합’ 불법성에 관한 자료 발굴이 이루어지고 그 연구 성과에 근거하여 2010년 ‘한국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이 나왔다. 일본 정부가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양국 문제를 새롭게 풀어야 한다는 내용이 든 성명문에 일본 지식인 540명이 서명하였다. 식민지배 관련 자료의 발굴과 공개는 탈냉전 시기와 맞물린 새로운 상황이었다. 역대 한일회담은 식민지배의 책임 문제를 다룬 적이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청구권 문제와는 별개로 양국이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닌가. 망언과 사죄 요구가 연속하는 가운데 두 나라는 청구권과 식민지배 책임 문제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변별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따지고 보면 현재의 징용자 배상문제도 두 요소가 얽혀 겪는 난항이다. 전후 냉전체제 속에서 많은 혜택을 누린 일본이 이제는 ‘양보’의 큰 결단을 내려야 할 차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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