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사는 것을 사랑한 인물들

2023. 3. 24.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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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울 것 없지만 삶 담담히 순응
‘루이즈’ 얘기 마음에 잔잔한 파문

다니엘 살나브, ‘루이즈’(‘추운 봄’에 수록, 이재룡 옮김, 열림원)

소설에서 인물은 대개 고유명사로 소개된다. 그 이름을 가진 인물에게 작가는 독자가 한눈에 상상할 수 있는, 키가 크거나 작거나 말랐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등의 겉으로 드러난 특징 외에도 성격이나 취향 같은 것들도 잊지 않아서 그가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믿게 한다. 그보다 인물이 더 살아 있다고 독자가 느낄 때는 그가 어떠한 계기로 무언가를 경험하다 마침내 결심하고 행동하게 될 때가 아닐까.
조경란 소설가
그런데 ‘루이즈’는 그런 점에서 좀 이상하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루이즈라는 여성의 삶을, 그것도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를 시간 순서대로 그린 이 지루할 뻔한 이야기가 마음에 파문을 남긴 것은 분명한데 무엇 때문인지 이유를 찾지 못해서. 아무리 봐도 루이즈라는 인물은 다른 소설의 인물들과는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한데 말이다. 이런 눈에 띄지 않고 소극적인 인물을 앞장세워서 다니엘 살나브는 얇디얇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투명하고 둥근 구(球) 같은 단편소설 ‘루이즈’를 썼다. 삶과 죽음의 타래가 필연성으로 얽혀 있지만 꼬인 데가 없는.

루이즈는 1896년에 가난한 집안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작가는 이런 표현들로 독자에게 루이즈를 소개한다. 온순한, 순종적인, 천성적으로 말이 없는, 특별한 자질이 없는, 소박한 성품의, 착하고 얌전한, 소리 없이 혼자 놀 줄 아는. 이런 루이즈에게 “삶의 가느다란 물줄기는 거의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완만한 언덕의 모래강변 사이로 곧장 흘러갔다.” 루이즈는 열두 살 때 학교를 떠나 봉제 가게 견습공으로 일을 시작했고 이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진 이십 대 때는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한다. 독자가 알기에 루이즈가 평생 딱 한 번 눈물을 흘리는 때가 있었다. 생기지 않는 아이와 관련된 밤에.

이 단편에 본격적으로 의미가 깃들기 시작한 지점은 루이즈가 중년에 이른 부분이 아닐까. 빈손으로 태어났으나 우울해하지 않으며 자신이 그저 그런 처지에 놓인 것을 잘 알지만 자신이 “던져진 세계의 어느 한 지점은 그녀의 중심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천성적으로 말이 없는 루이즈는 사색에 잠긴다. 세상의 순리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루이즈는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깨닫는다. 마치 “강변에 앉아 강물의 흐름을 바라볼 때 그 시원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보다 깊은 생각에 빠지다 보면 죽음에 대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를 때가 있었는데 루이즈는 이렇게 여기기로 한다. 그것은 ‘자신이 떠나버린 방과 같은 것’이리라고. 방을 나가며 문을 닫는 일은 어렵지도 않고 거기에 무언가는 남아 있으니.

혼자가 된 노년에 루이즈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면서도 자기만의 방식대로 하루하루를 꾸려 간다. 이웃 사람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여행을 가고 텔레비전을 사서 뉴스도 보고 전화선을 설치하곤 조카와 길게 통화도 하며. 그녀의 세계는 넓어지지 않지만 살아가는 법을 새로 익히며 배운다. 기분이 상하는 일도 줄어들고 루이즈는 너그러워졌다. 그녀가 그렇게 되었을 때 죽음이 찾아왔다. 작가는 루이즈의 핸드백에 관한 묘사로 이 서정적인 단편을 마친다. “오래 사용해서 실밥이 터진 데가 살짝 벌어져 있었다.”

배운 것도 없고 부와 명예도, 남다른 자질도 없는 루이즈라는 사람의 한평생을 그린 이야기. 이것이 이 소설의 전부이다. 그녀는 태어났고 살다가 죽었다. 그것뿐이다. 세상에는 운명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루이즈가 그랬다. 크게 드러나지 않는 삶이었다. 작가는 그런 삶을 산 인물에게 ‘루이즈’라는 고유명사를 명명(命名)해 주었다. 눈에 띄지 않았지만 자신의 삶을 끝까지 살아낸 세상의 수많은 루이즈를 위하여. 서정성이나 사실주의적 경향 때문인지, 아니면 늘 누군가를 사랑했던 특징들 때문인지 ‘루이즈’는 플로베르의 단편 ‘순박한 마음’의 ‘펠리시테’, 안톤 체호프 단편 ‘사랑스러운 사람’의 ‘올렌카’를 떠올리게도 한다. 이들 모두가 사는 것을 참으로 사랑했던 인물들이었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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