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속 유령들’ 손에 세계의 운명이 달렸다…이게 뭔 소리인가 싶지만, 여전히 사랑[이종산의 장르를 읽다]

기자 2023. 3. 24.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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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
켄 리우 지음·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400쪽 | 1만6000원

켄 리우의 첫 번째 단편집 <종이 동물원>을 읽었을 때는 그의 단편들이 누구나 무난하게 좋아할 법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테드 창의 직계 후손 같다고 할까? 이렇게 말하면 시큰둥해 보이겠지만, 나는 켄 리우의 단편들이 정말 좋았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두 번째 단편집을 읽어보니 켄 리우는 의외로 대중적인 방향보다 SF 마니아층을 위한 소설을 쓰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따뜻한 사랑이 강조되었던 첫 번째 단편집과 달리 두 번째 단편집으로 묶인 작품들은 꽤 날이 서 있다. 그만큼 세계가 더 엉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일까? 두 번째 단편집은 전쟁과 경제 대공황, 환경파괴 등에 대한 불안과 경고로 가득 차 있다. 그가 바라보는 지구는 눈을 가린 말처럼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번 단편집에 수록된 ‘포스트휴먼 연작’은 작가 스스로 그런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답을 찾은 것 같은 연작이다. 포스트휴먼 연작은 세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들은 목줄을 차지 않을 것이다’, ‘신들은 순순히 죽지 않을 것이다’, ‘신들은 헛되이 죽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신’이란, 데이터센터에 사는 ‘의식’들이다. 뇌의 신경 패턴을 스캔하는 것이 가능해진 미래 세계에서 대기업들은 자기 회사 소속 유능한 인재들의 뇌를 스캔해 알고리즘으로 만든다(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그렇다. 이 연작은 IT인들을 위해 쓰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코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연작의 주인공은 ‘메디’라는 10대 소녀다. IT기업의 엔지니어였던 메디의 아빠 ‘데이비드’는 죽기 직전에 가족의 동의 없이 뇌를 스캔당해 육체 없이 의식만 데이터센터에 갇힌 채 영원히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메디는 이렇게 말한다. “회사의 수석 엔지니어를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서 보존하려고 한 거군요. 병 속에 담긴 뇌처럼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 아빠가 회사를 위해 계속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줄 테니까요. 죽은 후에도.”

데이비드의 동료이자 뇌를 스캔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중심인물인 왁스먼 박사는 데이비드의 뇌 속 신경 패턴 중 회로 배열 및 설계와 관련이 있는 코드는 데이비드의 사적 소유물이 아니라 기업의 지식재산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가 합법적이었다고 메디와 메디의 엄마에게 설명한다. 무슨 ‘개소리’인가 싶지만, 합법적 논리라는 것이 때로 얼마나 황당무계한지 뉴스를 보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데이비드만 이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니다. 세계의 유능하고 똑똑한 여러 인재들은 자신이 소속되었던 직장에 의해 동의 없이 뇌를 스캔당해 ‘기계 속 유령’으로 산다. 너무나 머리가 좋은 죄로 기계 속 유령이 된 그들이 얌전히 회사 좋은 일만 해줄 리는 없다. 데이터센터에 갇힌 기계 속 유령들은 복수심과 분노에 불타 세계에 반격을 가한다. 국가들의 보안 프로그램을 해킹해 서로 미사일을 날리게 만들어 전쟁이 일어나도록 분란을 일으키는 식이다. 모든 것이 데이터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데이터센터의 유령들은 ‘신’이 된다. 세상을 살릴 수도, 멸망시킬 수도 있는.

이런 세상의 구원자로 두 소녀를 내세운 것은(게다가 ‘딸’이라는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은 특히나) 좀 상투적으로 느껴지지만, 그중 한 소녀가 데이터센터에서 태어난 인물이라는 것은 재밌다. 데이터센터의 신들은 현실 세계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런 향수가 자신들을 약해지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애초에 데이터 세상에서 태어난, 현실 세계에 대한 향수가 없는 아이를 만든다.

메디는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는 데이터 자매에게 ‘미스트’라는 이름을 준다. 미스트는 현실 세계에서 살아본 적은 없지만, 메디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현실 세계를 경험한다. 미스트는 마치 챗GPT-3처럼 말한다. 아마 켄 리우도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대화를 나눠본 것 아닐까 싶다. 메디가 할머니와 토마토를 길렀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면, 미스트는 토마토의 품종 개량에 대한 지식을 늘어놓는다. 미스트는 감정에 얽매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냉철하기만 한 로봇도 아닌, 매력적인 캐릭터다. 데이터센터 속에 사는 인물들이 말보다 이모티콘 쓰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긴다는 것은 켄 리우의 귀여운 아이디어다(나는 그런 깜찍함이 좋다).

<종이 동물원>에 담긴 켄 리우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좋아했던 나에게 거창한 세상론을 시니컬하게 풀어나가는 소설들이 묶인 두 번째 단편집은 사실 조금 아쉽다. 그러나 취향이든 아니든, 그가 단편을 정말 깔끔하게 잘 쓰는 ‘선수’라는 감탄은 할 수 있다. 켄 리우는 SF 단편 쓰기의 선수다. 첫 번째 단편집에서 사람들이 좋아했던 사랑의 마음도 아예 놓치지는 않았다. 켄 리우의 소설에서 핵심은 여전히 사랑이다.

이종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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