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유산이 낳은 책과 역사, 배려의 볼로냐

한겨레 2023. 3. 24.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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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주일우의 뒹굴뒹굴
아동도서전의 도시를 가다
올해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 설치된 일러스트레이터의 벽. 자신의 작품과 연락처를 붙여놓으면 출판 관계자들이 흥미로운 작품을 고른다. 주일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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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여행을 떠나려면 먼저 책을 산다.

여행안내서도 사는데 코로나19 이후에는 신통한 책이 별로 없다. 몇년의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안내서 만드는 부서들을 출판사들이 모두 정리해버린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래서 차라리 소설이나 산문을 들추는 경우가 늘었다.

튀르키예(터키)를 가면 파묵의 <이스탄불>을, 이탈리아를 가면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읽는 식이다. 장흥을 간다면 이청준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넘고, 대천을 간다면 이문구의 <일락서산>을 따라 나무 아래로 산책한다. 여행을 가기 전에 갈 곳에 대한 책을 미리 보는 것은 기대를 만드는 과정이라 여러 날 즐겁다. 다녀와서 추억을 더듬는 데도 미리 다녀온 작가들의 작품들에 기대어 이리저리 맞추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스마트폰에 꼭꼭 저장한 사진들을 이리저리 넘겨보는 것이 지루해질 때 다시 기분 좋은 긴장을 팽팽하게 느낄 수도 있다.

볼로냐에서 부산을 떠올리다

도서전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매년 봄에 이탈리아로 간다. 물론 놀러 가는 것이 아니어서 여행의 즐거움을 온전히 느낄 수는 없지만, 스스로에 대한 위로로 책을 산다.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은 매년 열리는 행사라 매년 가고, 그래서 책도 매년 사들이니 이탈리아 관련된 책들이 제법 쌓였다. 올해는 야마자키 마리의 만화들을 사들였다. <플리니우스> 다섯권, <테르마이 로마이> 여섯권, 그리고 <맹렬! 이탈리아 가족>의 전자책. 이탈리아의 역사와 현재에 대한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책들이다.

<맹렬! 이탈리아 가족>의 저자 야마자키는 미술이 배우고 싶어 중학생 때부터 그림을 보러 유럽을 넘나들다 이탈리아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의 조언에 따라 피렌체 국립미술원에서 공부를 했다. 인연이 이어져 이탈리아 할아버지의 손자와 결혼해 이탈리아에 정착했다. 볼로냐에서 피렌체까지 기차로 30분이면 닿는 거리고, 만화가가 살았던 동네도 볼로냐 인근이라는 것을 책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할머니 둘, 시부모, 시누이에 아이까지 한집에서 복닥거리며 사는 이야기를 통해, 멋진 건물만 즐비한 도시에서 화려한 벽 뒤에 숨은 이탈리아 사람들을 느낀다. 야마자키의 자전적 이야기에 미소를 지으며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운 이탈리아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에스프레소 바에 서서 들었다.

지난 3일 이탈리아 볼로냐로 향하면서 내년부터 시작하려고 궁리 중인 부산국제아동도서전 생각을 많이 했다. 1947년에 시작한 서울국제도서전은 전쟁 등의 참화로 개최하지 못한 것을 제외하고 60회가 넘게 이어지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 행사가 됐다. 산업박람회 성격을 더해서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다. 도서전은 다양한 뉴미디어의 등장에 따라, 종이책의 쇠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의 확장에 따라 국경을 넘는, 혹은 미디어를 넘는 저작권 거래의 중심으로 변모하고 있다. 다만 서울국제도서전의 아쉬운 점은 행사가 성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미래의 독자들을 고려한 행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거나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 그리고 어린 독자들과 부모들 모두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영화·게임 등의 콘텐츠 관련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해온 부산에서 그 모든 이야기들의 시작인 책의 축제를 만드는 것은 어떨까 상상을 했다. 부산은 새로운 도서전을 담을 그릇으로 충분할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볼로냐 거리를 걷는다.

1088년에 세워진, 모든 대학의 모교라 불리는 볼로냐대학교 건물들 사이에 걸린 펼침막. 울리세 알드로반디(1522~1605) 탄생 500주년 기념 전시를 알린다. 이탈리아 최초의 식물원을 만들고 유럽에서 자연사박물관을 만든 사람이다. 볼로냐대학교의 도서관과 박물관에 그가 남긴 책이 3900여권, 편지 등 기록물이 400여점, 광물, 화석, 그리고 생물의 샘플 수천점이 남아 있다.

플리니우스·알드로반디의 유산

우리는 알드로반디를 비롯한 자연학자들이 모으고 기록하고 분류한 작업들이 현재를 만든 기초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에 앞서 로마의 정치인이며 군인인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가 있었다. 그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 <플리니우스>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시작되는데 그는 폭발에도 도망가지 않고 상황을 기록한다. 곁에 있던 조카는 편지에 “불길하게 한쪽이 밝아 왔는데, 그것은 먼동이 트는 것이 아니라 불길이 조여오는 것이었습니다… 잿더미가 무섭게 날아들더니 다시 한번 암흑이 사방을 뒤덮었습니다”라고 썼다. 잿더미에 묻힌 폼페이. 이런 태도가 중세에 눌려 있다 폼페이 발굴처럼 다시 살아나 알드로반디가 이었다.

볼로냐대학교 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울리세 알드로반디의 목판. 주일우 제공

대학가에서 시내로 발길을 옮기면 만나는 고고학박물관에는 중동에서 이주한 에트루리아 사람들의 유물부터 그리스와 로마의 유물들,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이집트 유물까지 갖추고 있다. 물리박물관, 군사건축박물관, 지리항해박물관, 인체해부박물관, 천문박물관, 음악박물관 등등 두 손으로도 다 꼽을 수 없는 최상급 컬렉션이 볼로냐대학교가 1천년간 활동한 결과로 남아 있다. 우리도 삼국시대부터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한 기록이 있으니 꿀릴 것은 없지만 1천년 넘게 쌓은 문화적 자산이 도시에 그대로 거대하게 쌓여 있는 것은 부럽다. 이 거리를 걸으면 <테르마이 로마이>의 주인공 루시우스가 로마와 현대 일본을 오가는 설정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볼로냐가 먼지만 켜켜이 쌓인 도시는 아니다. 이 도시엔 12세기에도 학생이 2천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인구가 40만에 육박하는데 서넛 중 한명은 학생이다. 주말이면 시내는 차량을 통제하는데 큰길에 젊은이들이 가득 들어찬다. 볼로냐는 노동자와 조합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곳은 저항의 전통이 강했고 파시즘에 반대했다. 그때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름이 시내 중심 광장의 동판에 새겨져 있다.

무엇보다 이 도시에 생기를 더하는 것은 와인과 파스타. 볼로녜세 파스타의 고향이고 탄산이 혓바닥을 기분 좋게 쏘는 람브루스코의 산지다. 이 포도 품종은 고대 로마 시대에도 기록이 있는 오래된 것인데 척박한 곳에서 잘 자라고 생산력이 좋다. 이 포도의 생산성이 사치품인 와인을 만들기 위한 포도밭이 식량을 생산하는 밀밭을 침범하지 않도록 막았다. 역사, 젊음, 저항, 조합, 배려, 맛, 풍요와 같은 단어들을 새로운 도서전과 그것을 품을 부산이 지향해야 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만화애호가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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