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seas Trip] 크레타 섬에서 온전한 자유를 꿈꾸며

박찬은 2023. 3. 2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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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가 바라본 반짝이는 해변가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이자 유럽의 최남단 섬으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배경이 된 곳이자, 이 소설을 쓴 현대 그리스 문학의 대표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 1970년대 전 세계 히피족의 집성지가 된 해변, 희귀한 핑크색 모래가 있는 무인도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스폿들. 그러나 3월의 비수기가 아니었다면 크레타 섬으로의 여정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1960년대 전 세계 히피족의 성지였던 마탈라 해변

비수기와 카잔차키스

여정이 계획대로 흘러가면 좋겠지만 그것은 그저 여행자의 바람일 뿐이다. 그리스 수도 아테네를 여행한 뒤 여정은 뜻하지 않은 변화를 맞았다. 그리스 국토를 둘러싼 이오니아 해와 에게 해 주변 크고 작은 6000개가 넘는 섬들 가운데 크레타(Crete) 섬은 애초 계획 밖에 있었다. 내 구미를 당기기엔 섬의 면적이 커도 너무 컸기 때문이다. 지도상에서 에게 해 주변에 점처럼 흩뿌려져 있는 비교적 작은 크기의 섬, 예컨대 섬 전체에 DJ음악이 쾅쾅 울려 퍼진다는 미코노스(Mykonos) 섬이나 훼손되지 않은 자연 경관으로 마치 무인도 같다는 밀로스(Milos) 섬이나 그 외 다수의 아주 작은 섬들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3월’의 그리스는 여행자의 희망을 단박에 실망으로 바꿔놓았다.

비수기’라는 명목 하에 아테네에서 주변 섬을 잇는 대부분의 여객선 시간표는 손에 꼽을 만큼 그 수가 제한적이었던 것. 그리스에서 여행자를 환영해 마지않는 성수기에 해당하는 5월부터 8월까지를 제외한 나머지 달은 여행자에겐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하필이면 그중 하나에 내가 눈치 없이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으니. 그제서야 애초 계획에는 없었지만 이날 밤 출발 가능한 여객선 시간표에 있는 하나뿐인 옵션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섬의 면적쯤이야 좀 크면 어떠랴. 아무렴 목적지가 코 앞인데, 태세 전환은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가 다행히도 그런 속물근성을 면하게 해줬다. 크레타 섬을 반드시 여행해야 하는 이유를, 이 섬을 여행하는 동안 나름 소신을 지킬 수 있는 밑거름을 소설에서 찾았다. 젊은 지식인 ‘나’가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던 중에 60대 노인 ‘조르바’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소설을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는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1883년 당시 오스만 제국령이던 이라클리오(Heraklion)에서 태어나고 사망했다. 오늘날 이곳 섬의 가장 큰 도시이자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는 이라클리오에는 카잔차키스의 무덤이 성문 근처에 자리하고 있어 그의 문학세계에 영향을 받으며 성장해온 전 세계 여행자들의 발길을 모은다. 1957년 카잔차키스가 사망했을 당시 동방정교회가 그의 무덤을 묘지 안에 두지 못하도록 반대했기 때문에 현재의 위치에 무덤이 조성되었다는 설이 있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미리 써놓았다는 세 줄의 묘비명

크레타 섬 여행의 첫 목적지, 이라클리오 도심에서 남쪽으로 약 1㎞ 떨어진 곳에서 카잔차키스의 무덤을 마주했다. 야트막한 언덕 꼭대기 그의 무덤 주변에는 정적만이 감돌 뿐이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귓가를 때렸던 차량의 소음들이 순식간에 종적을 감춘 덕분이다. 파란 하늘 아래 야자수가 위용을 과시하고, 장식 하나 없이 반듯하게 놓여 있는 네모난 무덤과 그 앞에 꽂힌 나무 십자가가 조화를 이루며 여행자를 반긴다. 대문호의 묘라고 하기엔 소박하기 짝이 없지만 그가 살아온 인생이 이 풍경과 닮았으리라. 살아 생전 영혼의 자유로움을 갈망하며 전 세계를 방랑한 카잔차키스, 새로운 자유를 탐하며 그의 땅을 찾은 여행자, 인간에게 ‘자유’는 어떤 의미일까? 그가 생전에 미리 써놓았다는 세 줄의 묘비명을 바라보며 그 의미를 생각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1 암모우다라 해변의 일몰 2 해변에서 캠핑 3 히치하이킹 대신 렌터카

히치하이킹 대신 렌터카

사실 애초 계획은 몇 가지 더 있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 텐트와 침낭, 조리도구까지 모조리 배낭에 넣어 왔었다. 섬에서의 백패킹을 희망했기 때문. 그리고 가능하다면 교통수단은 도로 위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히치하이킹을 시도할 것. 어차피 그리스 섬이 아니어도 세계 어느 나라 섬을 가더라도 대도시처럼 대중교통이 편리하게 갖춰져 있지 않을 테니, 히치하이킹은 어쩌면 현명한 계획과도 같았다. 지난밤 일행과 함께 둘이서 계획대로 움직이긴 했다. 이라클리오 외곽에서 두어 시간 히치하이킹을 시도한 끝에 가까스로 현지인 차를 잡아타고 서쪽으로 10여㎞ 떨어진 암모우다라(Ammoudara) 해변에 도착한 뒤 목 좋은 장소에 텐트를 쳤다.

인적 하나 없는 자연의 공간에서 철썩철썩 파도소리 들으며 잠을 청하는 순간은 황홀하다 못해 자연에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귓가를 때리는 파도소리만큼이나 귓가를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도는 말이 있었다. “이라클리오 주변이라면 몰라도 섬 곳곳을 둘러볼 생각이라면 아마 운전자를 만나긴 쉽지 않을 거예요. 지금 여행 시즌이 아니라서 도심을 벗어나면 도로를 달리는 차량을 보기가 굉장히 드물거든요. 히치하이킹 말고 차라리 차를 렌트하지 그래요?” 낯선 여행자를 이곳 해변까지 친절하게 태워주고 안내해준 운전자는 이맘때 그리스가 비수기임을 강조하며 조언을 건넸다. 비수기 앞에 또다시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걸까. 3월이라고는 해도 남쪽 나라답게 한낮의 기온이 우리나라 초여름 못지 않게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상황. 이곳의 계절구분은 오직 성수기와 비수기, 이 둘뿐이다.
(맨위)무인도 칼리돈 반도 해변 (다음 사진)신선한 페타치즈를 듬뿍 넣은 캠핑 요리 1 산맥 정상에서 내려다 본 섬 풍경 2 무인도에서 캠프파이어

다음날 몇 번의 시도 끝에 히치하이킹에 성공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라클리오에 다시 닿았다. 대부분의 차량이 도심으로 향한 탓에 여정이 원점을 맞은 것. 결국 렌터카를 찾아 나섰다. 비수기라는 이유로 도심에 위치한 렌터카 서비스는 모두 문을 닫았고 수소문 끝에 찾아낸 단 한 곳, 바로 공항에 붙어 있는 렌터카 회사였다. “비수기라서 얼마나 좋아요. 오히려 지금 여행할 수 있다는 데 감사해야 할 걸요. 여행 시즌이 되면 모든 게 너무 바빠요. 방문객도 너무 많고요. 어느 해변을 가도 사람들이 넘쳐나요. 당연히 렌터카 비용도 지금보다 훨씬 비싸고요. 조용하고 고요한 섬을 즐기세요. 지금이 아니면 불가능해요.” 렌터카 직원의 말이 비수기를 핑계 삼은 여행자의 불평불만을 빠르게 잠재웠다.

무인도에서의 하룻밤

크레타 섬은 면적 8303㎢로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이자 지중해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이 섬은 동에서 서까지 260㎞에 이르며 남북으로 폭은 60㎞ 정도로 좁은 편이다. 폭이 12㎞에 불과한 레라페트라(Lerapetra) 같은 지역도 있다. 그리스의 다른 도시나 섬과 마찬가지로 올리브 농업이 섬의 주요 산업이다. 섬의 북쪽 해안에 있는 엘룬다(Elounda) 지역으로 향하기 전 올리브 농장으로 유명한 네아폴리스(Neapolis) 마을에 잠시 정차했다. 마을 전체가 올리브 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올리브와 올리브 오일은 섬의 농업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마을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2㎞ 떨어진 바실라카이스(Vassilakis Estate) 올리브 농장을 찾았다. 바실라카이스 가족이 세대에 걸쳐 경영하는 이 올리브농장은 1865년 이 마을 최초의 올리브 생산 업체로 문을 열었다. 가족의 일원임을 밝힌 직원이 여행자를 위해 투어가이드를 자처했고, 올리브 오일을 중심으로 한 농장의 제품과 공장 시설이 두루 소개되었다. 오랜 세월 전통 재배와 수확 방식을 고수해온 이곳의 올리브는 예나 지금이나 오직 섬의 햇빛과 바람, 공기를 머금고 열매를 맺는다. 올리브 한 알에 섬의 자연이 모두 담겨 있다.
(위로부터)산맥 정상에서 내려다 본 섬 풍경, 무인도 칼리돈 반도 해변

네아폴리스에서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택했다. 산지가 많은 이 섬은 동에서 서로 높은 산맥이 이어져 있어 그 길을 제대로 보려면 구불구불 이어진 국도를 달리는 게 여행의 묘미를 배가시킨다. 과연 그랬다. 국도를 달리는 동안 차창 너머로 보는 풍경에 만족할 수 없어 몇 번이고 차를 세웠다. 다시 보고 또 보아도 섬은 다양한 얼굴로 여행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산맥을 오르고 올라 어느새 파랗게 물든 해안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엘룬다는 7개의 작은 마을과 무인도로 구성된 지역이다. 이곳의 무인도 지역인 칼리돈(Kalydon) 반도가 이날의 최종목적지다. 올리우스 요새에서 좁다랗게 이어진 길이 칼리돈 반도와 닿는다. 길이 무척 협소해서 차량 양 옆으로 바닷물이 닿을 듯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칼리돈에는 다수의 교회와 수도원, 해변만이 자리한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1834년 기독교 사회인 그리스에서 무슬림 가족이 들어와 터를 닦고 살았던 장소이며, 1903년부터 나환자 식민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수백 명의 나환자가 이곳에서 살다가 죽었고, 1957년 7월이 되어서야 마지막 남은 희생자들이 아테네 근처 병원으로 이주하면서 나환자 식민지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반세기가 지나 이제는 관광지로,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어 하는 여행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사람의 때가 타지 않은, 나만 간직하고 싶은 이곳 해변에서 여행자들은 비로소 온전한 자유를 마주한다.
히피족이 거주했던 동굴

아프리카 황사 뚫고 히피족 해변으로

하루 새 날씨가 급변했다. 자고 일어나 보니 어제의 청명한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해가 훤히 밝아올 아침인데도 어둑어둑한 새벽의 여운이 길다. 구름이 하늘을 가린 어둑한 아침이라기보다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과 닮아 있었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품고 있는 크레타 섬이건만 비수기라 인적도 차량도 드문데 난데없이 미세먼지라니, 생각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구름인지 미세먼지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을씨년스러운 날씨를 배경으로 아침을 뚝딱 해치운 뒤 섬의 최북단으로 향했다.

칼리돈에서 동쪽으로 약 100㎞ 거리에 바이(Vai) 비치가 있다. 2시간 가까이 달리는 동안 회색 빛이었던 하늘은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누렇게 자신의 컬러를 갈아치웠다. 3월의 서울처럼 미세먼지에 황사까지 겹친 딱 그 모습이다. 후에 현지인을 통해 그 내막을 들을 수 있었는데, 매년 3월이면 중국발 황사처럼 아프리카발 모래바람이 섬 전체를 뒤덮는다고 한다. 아프리카 사막에서 불어온 거대한 모래바람이 렌터카 컬러까지 바꿀 심산이다.
(좌로부터 시계방향)유럽에서 가장 큰 자연 야자숲이 있는 바이해변, 1960년대 전 세계 히피족의 집성지였던 마탈라 해변

야자 해변’이라 불리는 바이 비치, 유럽에서 가장 큰 자연 야자 숲이 특징인 곳이다. 비구름에 강풍까지 합세한 날씨 탓에 야자 숲이 거대한 유령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는 형국이다. 1970년대 영국에서 자유를 찾아 크레타 섬에 온 영국인 히피들에 의해 바이 비치가 처음 발견되어 대중화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1980년대초 이곳의 유명세를 듣고 전 세계에서 모여든 배낭여행자들로 무질서가 이어졌고, 마침내 쓰레기 처리로 골치를 앓다 폐쇄 조치된 바이 비치는 그리스 정부에 의해 보호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이전의 모습을 회복해 현재에 이른다. 사실 유럽 히피들이 바이 비치를 새로이 발견하고 또 이곳으로 몰려든 건 마탈라(Matala)를 떠나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바이 비치 이전 히피들의 집성지라 불리었던 곳, 1960년대 히피의 역사가 새로 쓰여진 곳이다.

섬의 중남부에 위치한 마탈라는 히피들이 찾기 전 평범한 어촌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해변 한쪽에는 암벽이 있는 거대한 모래사장이 이어져 있고, 푸른 동굴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고대 동굴이 가득하다. 이 점이 히피들을 자극했다. 동굴은 히피족에 의해 점령되어 그들의 집으로 변모했고, 지금도 동굴에서 살아가는 히피족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그 당시 히피족들로 몸살을 앓던 이 마을은 그리스 정교회와 군대가 힘을 합쳐 히피족들을 모두 내쫓으며 평화를 맞았다. 골치덩어리에 지나지 않던 히피 문화가 현재는 이곳의 관광산업을 이끄는 중심축이 되고 있다는 사실, 아이러니한 역사다.
핑크색 모래로 물든 엘라포니시 해변

내륙탐험부터 핑크색 모래해변까지

1971년까지 크레타 섬의 중심 도시는 하니아(Cha nia)였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였던 크레타 섬은 기원전 69년 로마에 정복되었다. 이후 1204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로 남았던 섬은 이후 4차 십자군 원정 때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이 400년간 이어졌다. 하니아는 베네치아 시대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요새화된 도시로 유명세를 떨쳤다.

섬의 서북쪽 하니아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내륙탐험에 나서는 여정을 즐기기도 했다. 먼저 쿠르나스(Kournas) 호수 주변에 차를 세웠다. 크레타 섬의 유일한 담수호인 쿠르나스 호수는 둘레가 3.5㎞로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마을 근처 호수는 거대한 바다와는 또 다른 경험을 안겨준다. 섬의 대표적인 관광지 사마리아 협곡(Samaria Gorge)에도 발을 들였다. 섬의 남서쪽 사마리아 마을 이 협곡은 1962년 그리스 국립공원으로 조성되어 협곡 길이가 16㎞에 이른다. 세계 생물권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사마리아 협곡은 과거 ‘크리크리(Kri-kri)’라 불리는 희귀종인 크레타 염소를 위한 피난처 장소로 쓰였다. 마을 주변에서 몇 차례 도로를 점령한 염소무리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이 크리크리 염소인지는 알 길이 없다. 협곡 마을 주변에 상당히 많은 수의 염소농장이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위로부터)관광지로 유명한 사마리아 협곡, 예배당이 자리한 서쪽 최남단 끝자락, 서북쪽 토폴리아 마을 전경, 도로를 점령한 사마리아 마을 주변 염소들

여정의 막바지에 이르러 섬의 서쪽 최남단으로 간다. 이라클리오에서 만난 한 여행자가 강력 추천했던 곳, 지도상에 반도처럼 붙어 있는 타원형의 아주 작은 섬, 엘라포니시(Elafonisi)에 닿는다. 핑크색 모래로 물든 독특한 해변을 볼 수 있어 유명한 곳이다. 지구상에서 핑크색 모래가 발견되는 해변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죽은 산호초와 공생관계에 있는 색소 미생물, 파도에 의한 조개 조각 등의 퇴적물이 쌓인 결과로 핑크색 모래가 생겨난다고 한다. 날씨가 좋으면 얕은 물을 통해 엘라포니시 해변에서 반도로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반도 끝까지 산책이 가능하다. 광활하게 펼쳐진 모래사막 너머에서 예배당과 동굴을 차례대로 만났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 지중해를 저 멀리 바라보며 섬의 서쪽 끝에 당도했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현실처럼 느껴졌다. 소설 속 조르바가 하루하루 바라다본 크레타 섬의 풍경은 그에게 꿈이었을까, 현실이었을까? 생각을 곱씹어본들 답을 알 수 없는 물음표만 늘어날 뿐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여정은 끝이 났지만 이곳 섬에서 자유를 갈망하며 촉발된 사고의 흐름은 망망대해만큼이나 그 끝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72호(23.3.28)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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