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미술래잡기] 용서는 없어 그래서 영광도 있을 수 있어

2023. 3. 24. 17: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비참한 피해자에서
분연히 일어나 회생한
17세기 伊 아르테미시아
현실서 못 이룬 복수를
자신의 작품을 통해 완성
분노를 창조의 원동력 삼아
역사에 남을 영광의 자리에

'더 글로리'의 결말이 드러났다. 주인공 문동은이 어떤 방법으로 복수를 할지 궁금해서 이야기를 따라갔다. 사악한 가해자들과 그들의 죄를 덮어준 이들에게 처참히 짓밟힌 주인공은 자신이 직접 나서는 사적 응징을 하지 않는다. 대신 치밀한 준비를 통해 악마 같은 이들이 자기 무덤을 팔 계기만 제공했고, 무자비한 탐욕을 반성하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 자멸해갔다.

비참한 피해자에서 분연히 일어난 회생의 아이콘을 미술사 속에서 찾으면 단연코 17세기 이탈리아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있을 것이다. 여성은 교육을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지만, 화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눈에 띄는 재능을 보이는 딸에게 직접 기초를 가르쳤고, 10대 후반에는 이미 준수한 실력을 갖출 정도가 되었다. 로마의 큰 벽화 작업을 의뢰받은 아버지는 후배 아고스티노 타시를 보조로 고용하면서 딸의 수업도 부탁했는데, 타시는 다른 동료와 함께 지속적으로 아르테미시아를 희롱하고, 결국 그를 겁탈하고야 말았다. 순결을 뺏긴 아르테미시아는 타시가 자신과 결혼해주리라 믿고 기다리다 약속을 지키지 않자 그를 강간으로 고소하였다.

1612년의 재판은 장장 7개월간 이어졌다. 스무 살도 안 된 소녀는 재판정에서 자신이 당한 피해를 조리 있게 몇 번이고 확실하게 진술했다. 진술의 신빙성을 입증하려고 많은 조사관 앞에서 산부인과 검사를 받고, 고문까지 당하면서도 그는 피를 흘리며 자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외쳤다. 피해자가 온갖 모욕을 당하는 중에도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총애를 받던 가해자 타시는 별 다른 구속 없이 자신의 죄를 계속 부정하다 유죄를 선고받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로마에서 추방되는 선에서 처벌이 마무리되었다.

가해자는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오명만 뒤집어쓴 아르테미시아는 그래도 무너지지 않았다. 좋은 동료를 만나 결혼하고 피렌체로 이주한 그는 훌륭한 작업을 발표하며 씩씩하게 활동했다. 재판 이듬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바로크 미술의 걸작이다. 유대인을 핍박해온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승리와 술과 여색에 취해 잠이 든 틈을 타 유디트가 적장의 목을 따는 구약의 한 장면은 수많은 작가들이 이미 다룬 주제였다. 그러나 적의 머리를 들고 의기양양하거나 요염한 유디트만 표현되어 온 것에 비해, 아르테미시아는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를 한다. 유디트와 그의 시종은 건장한 여성들이지만, 힘 센 장군을 상대하기에는 무리라 둘이 힘을 합쳐 남성을 상대하고 있다. 여성 조력자의 부각은 무자비한 사회에서 문동은의 이모님처럼 약자끼리 연대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 간 페미니즘적 제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유디트는 작가의 자화상, 홀로페르네스는 타시의 초상화에 가까워서, 아르테미시아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완벽한 복수를 자신의 작품으로 완성한 것이 확실하다.

유디트는 단검으로 자신과 자기 조국을 유린한 홀로페르네스를 처벌하지만, 아르테미시아는 붓을 들고 싸웠다. 이후로도 그는 위험에 처하거나 능욕을 당해도 용감하게 맞서는 성경 속 여성을 주제로 한 인상적인 작품을 연이어 발표했다. 그의 시작은 비참했고, 여성이 직업 활동을 하는 것도 힘들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는 특별한 '여성' 화가가 아닌 그야말로 '최고의' 화가로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부터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초청을 받을 정도로 전 유럽에 그 명성이 자자한 경지에 올랐다.

폭거에 대항하는 여성을 끊임없이 그린 것으로 보아 아르테미시아는 아마도 어릴 적 비극을 잊어버리거나 가해자를 용서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 분노를 창조의 원동력으로 승화시켜 자기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면서 역사에 길이 남을 영광의 자리에 오를 수는 있었다. 반면 편안한 방종의 삶을 산 타시는 이제 그저 하나의 악당으로만 기억된다. 억울한 상처가 문동은의 표현대로 "시도 때도 없이 가렵고 아리고 뜨겁기만" 하다면 저쪽이 이기는 거다. 분통이 터지고 억울함을 느끼는 모두여. 용서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 스스로 더 찬란히 빛나면서 영광스러운 편이 훨씬 더 멋진 복수라는 걸 기억하자.

[이지현 OCI미술관장]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