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사회의 두 얼굴
코로나 초기 확진자 향한 비난
신상 털기에 범죄까지 이어져
마녀사냥식 온라인 여론몰이
현대사회 구조상 필연적 현상
차별반대·미투운동·보이콧 등
연대 표출하는 긍정적 효과도
약 3년 전 봄에는 코로나19 확진자 뒤에 번호가 붙었다. ○○백화점을 다녀간 xx번 확진자의 가족이 양성 판정을 받으면 그날부터 인터넷상에선 여론이 불타올랐다. '어느 지역 아파트 사는 누구 아들이라더라' '회사 출근했다가 반차 내고 아무개를 만나러 갔다더라' 같은 정보가 함께 나돌았다. 보건당국이 확진자 동선을 공식 발표하던 중대 사안이었으니 전 국민 관심이 뜨거운 건 어찌 보면 당연했을지 모른다.
문제는 슈퍼 전파자와 변이 바이러스가 생겨날 때마다 신상 털기, 마녀사냥식 여론몰이가 더욱 확산됐다는 점이다.
팬데믹 긴급사태를 수시로 발동했던 일본은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자경단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시민들이 생겨나 '자숙경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들은 외출, 이동, 영업제한 등 국가가 권고한 방역조치를 지키지 않는 대상을 감시하다가 경찰에 신고하거나 SNS에 사진을 찍어 올렸다. 방침을 어긴 이에겐 그 즉시 전 국민의 맹비난이 이어졌다. 협박성 게시물을 가게 앞에 붙이거나 다른 지역에서 온 차량에 흠집을 내는 등 범죄 수준이 심각해져 정부가 단속에 나설 정도였다.
책 '플레이밍 사회'는 이를 재난과 함께 되풀이된 정의의 폭주라고 부른다. 작가는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말을 빌려 "우리는 어떤 행위가 범죄이기 때문에 그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비난하기 때문에 범죄인 것"이라고 말한다. 제3자가 쏟아내는 공격과 비난의 총량이 곧 죄의 무게를 결정짓는 세상이 됐다는 것이다.
제목의 플레이밍이라는 단어와 관련해 일본 원서에 쓰인 정확한 표현은 '염상(炎上)'이다. 불꽃이 타오른다는 뜻이지만 온라인상 비난, 비방의 댓글이 쇄도하는 여론몰이 현상을 지칭하는 단어로 더 자주 쓰인다. 번역 과정에서는 한국 독자의 수월한 이해를 위해 플레이밍이라는 표현으로 바꿨다. 논란이 들불처럼 번지다, 논쟁이 가열되다 등 생각해보면 우리말에도 불(火)과 관련된 표현이 이미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플레이밍이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닌 세상에서 저자는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된 사회 자체를 분석하려고 노력했다. 현대사회가 가진 구조와 갈등 상황, 시대 배경을 따지고 사회적·정치적 관점에서 의미를 읽어냈다. 작가는 "플레이밍 현상은 단순한 좌우 대립 구도에서 곧바로 나타나지 않고 신자유주의라는 입장이 편입됨으로써 가속화하는 면이 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온 산을 불태우고 재를 남긴 들불이 자연 정화 작용이라는 장점을 가지듯 플레이밍 현상엔 분명 긍정적인 면도 있다. 해시태그 운동을 필두로 힘을 얻는 사회적 캠페인과 반차별 운동 등이 그 예다. 시위 현장에 나가지 않아도 '좋아요' '리트윗'을 클릭하는 정도만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가능해진 세상에선 피해자와 연대하는 일이 쉽고 빨라졌다. 인종차별주의에 대항해 전 세계에 퍼졌던 BLM(Black Lives Matter·흑인 목숨도 중요하다) 운동이나 국적과 나이, 직업을 가리지 않고 터져나온 미투(Me too) 운동은 폭발적인 여론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더 많은 것을 이뤄냈다.
책은 플레이밍 현상이 사회 정의와 결합하면 누군가를 살리는 불꽃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수단으로 꼽히는 것이 '캔슬컬처'다. 문제가 되는 행동이나 비판받아 마땅한 행동을 한 인물에게 보이콧을 공개 선언하는 일종의 불매운동 또는 손절인 셈이다.
다만 사회 변혁에 대한 의지와 피해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운동으로 시작됐으나 극단적인 폭력성으로 치닫는 최근의 일부 사례에 대해선 이 같은 문화가 최초가 아닌 최후의 수단이 돼야 한다고 조언을 남겼다.
[고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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