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韓日戰 안방서 첫 굴욕패 "문제는 이제부터야"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3. 24.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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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적 관객 200만명을 돌파하며 국내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일본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달도 차면 기운다지만 이 비유가 벌써 한국 영화에 들어맞는 걸까. 박스오피스 1위 일본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의 누적 관객이 200만명을 돌파하면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촉발시킨 일본 애니메이션 열풍이 당분간 더 이어지게 됐다. 올해 개봉한 영화 가운데 흥행 상위 10위 안에 포진한 일본 영화만 3편이다. 한국 영화는 정말로 긴 빙하기에 들어가기 시작한 걸까.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KOBIS)을 보면 올해 1분기 한국 영화 매출액 점유율은 30% 초반대로 주저앉았다. 이는 역대 최저 수준이다. 한국 영화는 코로나19 이전 매출액 점유율이 2017년 51.4%, 2018년 50.3%, 2019년 50.7%로 티켓 매출액의 절반 이상을 외화에 내준 적이 없었다. 매출액 점유율이 29.7~68.7%로 들쑥날쑥했던 코로나19 기간은 논외로 하더라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된 2022년엔 한국 영화 매출액 점유율이 54.4%를 기록해 과거 평년 수준을 회복한 상황이었다.

올해 들어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이 입소문을 타고 흥행 궤도에 올라 순항하면서 일본 영화 매출액 점유율은 31.6%로 치솟았다(1월 1일~3월 21일 기준). 한국 영화 매출액 점유율(31.4%)을 추월한 수치다. 일본 영화 매출액 점유율은 수년간 한 자릿수에 머물렀고 2017년 3.9%, 코로나 기간인 2021년 6.1%를 제외하면 대개 1% 안팎에 불과했다. '노(NO)재팬' 분위기도 한몫했다. 그러다 올해 들어 한국 극장 매출에서 차지하는 일본 영화 비중이 전례 없이 폭증한 것이다. '극장 한일전'이란 비유가 가능하다면 이번 1분기는 한국의 패배가 자명하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과 함께 누적 관객 수 50만명을 돌파한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 마을로', 43만명을 돌파한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를 합산하면 올해 1분기 일본 영화 4편을 관람한 관객은 716만명이다. 같은 기간 한국 영화는 '교섭' 172만명, '대외비' 74만명, '유령' 66만명, '카운트' 39만명, '마루이 비디오' 16만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작년 11월 개봉해 332만명을 동원한 영화 '올빼미', 작년 12월 개봉해 326만명을 동원한 영화 '영웅'은 그나마 손익분기점을 넘은 것으로 집계돼 체면을 살렸다. 그러나 앞서 대작이라고 여겨졌던 '비상선언'과 '외계+인'의 불운한 실패는 흥행 공식을 무참하게 깨버리며 충격을 줬다. 이후 한국 영화에서 이렇다 할 흥행작이 나오지 않고 있던 가운데 영화 '교섭'과 '유령'의 성적표는 영화계를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교섭' '유령'의 손익분기점은 각각 350만명, 335만명으로 추정되는데 '교섭'의 성적표는 손익분기점의 절반 수준, '유령'은 무려 6분의 1에 그쳐 호화 캐스팅이 무색하게도 후한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 그 자리를 대체한 건 '더 퍼스트 슬램덩크'였다.

'한산: 용의 출현' '아바타: 물의 길'의 흥행 사례를 보더라도 영화관을 찾는 관객 발걸음이 뚝 끊겼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극장용 영화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용 영화'의 양분이 관객의 극장행 동인을 잃게 만드는 주된 요인으로 거론된다. A평론가는 "극장에 굳이 가지 않아도 한 달, 두 달만 지나면 OTT에서 개봉할 것이란 관객의 예상이 현실화된 측면이 있다. '극장 공개 후 조기 OTT 개봉'이란 공식의 학습효과"라며 "서둘러 극장에서 관람해야만 지인과 대화가 통하는 영화가 굳이 아니라면 OTT 공개를 기다렸다가 자유롭게 선택하려는 관객이 늘었다"고 말했다.

3월 넷째주 넷플릭스 상위권에 오른 영화들은 이런 추세를 증명한다. 마동석·정경호 주연의 영화 '압꾸정', 김래원 주연의 영화 '데시벨'은 지난 22일 기준 넷플릭스 영화 2위와 3위에 올라와 있다. 두 영화는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해 흥행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정작 OTT 공개 직후에는 최상위권에 올랐다. 소지섭·김윤진 주연의 영화 '자백'도 극장에선 손익분기점의 절반에 못 미쳤지만 지난달 OTT에 공개된 직후엔 상당수 구독자가 재생 버튼을 눌러 수작으로 두루 인정받았다.

여러 OTT를 돌려 구독하는 B관객은 "OTT 구독권 한 달치에 육박하는 비싼 티켓값을 내기보다 한 달을 기다렸다가 보는 게 낫다. OTT 스트리밍으로 공개되지 않을 영화라면 애초에 관객들이 극장에서도 찾지 않았을 '망작'이란 계산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20대 초반 C관객은 "OTT에서 공개하는 10부작 이상의 시리즈 콘텐츠에 비해 극장 영화는 가성비가 떨어진다. '재벌집 막내아들' '더 글로리'와 같은 웰메이드 드라마 시리즈를 1만원대에 즐기는 시대인데 재미조차 분명하지 않은 영화를 굳이 찾아가서 볼 필요성을 못 느낀다"며 "완성도도 낮고 그럼에도 찾아가면 실망만 하게 되니 영화관에 갈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말 큰 위기는 2023년 1분기 한국 영화의 단기 부진이 아닌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이다. 상업 영화는 제작과 배급 이후 흥행에 성공한 작품의 회수자금이 다른 영화에 재투자되는 선순환 구조를 이뤄야 유지 가능한 대형 산업이다. 영화계에서는 '올해까지는 어떻게든 버티겠지만 진짜 문제는 내년 상반기 이후'라는 비극적인 전망이 고개를 든다. 매년 4월은 '극장 비수기'라 해도 그 기간 전후로 비수기가 너무 길다는 이유 때문이다.

대형 배급사에 근무하는 D팀장은 "코로나19 기간 찍어둔 대작은 아직 배급사들 창고에 남아 있다. 그러나 올해 기대작이 하나둘 극장에서 소진되고 나면 내년 하반기에 개봉할 작품이 없다는 게 문제"라며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해 자금 회수에 실패하면 투자는 급격히 얼어붙는다. 극장도 배급사도 마케팅사도 내년을 걱정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개봉하는 영화마다 실패로 귀결되다 보니 배급사들은 "아직 때가 아니다"며 몸을 사리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이에 극장들은 아예 배급사에 개봉지원금 제도를 만들어 배급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한국영화관산업협회에 소속된 CJ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멀티플렉스 3사는 '리바운드' '킬링 로맨스' '드림'의 개봉을 지원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개봉지원금은 협회에 축적된 별도 기금을 배급사에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지불한 티켓값 중 극장이 가져가야 할 몫의 일부를 정액으로 포기하고 이를 배급사에 양보하는 돈이다. 제살을 깎아서라도 개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멀티플렉스발 위기감의 증거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국 극장 독주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소울메이트'가 입소문을 타고 고군분투 중인 가운데 '웅남이'가 예매율 2위에 오르며 가세했지만 판을 뒤집기는 어려워 보여서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휩쓴 자리에 '존윅4'와 량차오웨이 주연의 '무명'이 오는 4월 개봉한다.

5월 '분노의 질주: 라이드 오어 다이', 6월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 7월 '오펜하이머' 등 대작도 줄줄이 개봉을 앞뒀다. 이병헌 주연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류승완 감독의 '밀수'와 '베테랑2', '극한직업' 이병헌 감독의 차기작 '드림', 마동석 주연의 '범죄도시3', 하정우·주지훈 주연의 '피랍', 우민호 감독의 '하얼빈'의 개봉과 성공이 간절해지는 이유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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