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보이지 않는 손'을 믿는가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3. 2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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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재, 금융영역 들어오면서
수요와 공급 원리 왜곡·상실
폭동·혁명·전쟁탓 가격 상승?
'가격' 쟁탈 위해 전쟁 나기도
"보이지 않는 손은 동화적 상상"
금융자본주의 민낯 고발한 걸작
게티이미지뱅크

치솟는 물가. 원인을 물으면 우리는 대개 이렇게 답한다. "원자재 가격 상승 때문이겠죠."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자. 해당 원자재의 '가격'은 도대체 누가 어떤 방식으로, 또 어떤 요인을 통해 결정하는 걸까. 하버드대 사회학 박사이자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 칸영화제 젊은감독상(YDA) 후보에 오른 저자 루퍼트 러셀은 이 점에서 질문을 심화시킨다. "그 가격은 과연 누가 어떻게 정하는가? '보이지 않는 손'은 정말 있는가?" 인간은 가격이 지배하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 가격이 형성되는 메커니즘을 결코 알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손을 경제학의 유일신처럼 숭앙했다. 가격의 원천은 '인간의 무지'라는 이름의 커튼 뒤에 은폐돼왔다.

아랍의 봄, 이슬람국가(IS)의 발흥, 브렉시트 투표, 베네수엘라 붕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세계사급 사건 현장을 누런 방탄조끼를 입고 직접 발로 걸으면서, 서로 수천 ㎞ 떨어진 지역의 비극은 오직 '가격(price)'이란 한 단어로부터 파생됐음을 설명해내는 걸작 논픽션이 출간됐다. 그리스 난민수용소와 월스트리트라는 양극단의 장소가 결과와 원인처럼 대응하고, IS가 동성애자를 내던지던 구덩이 근처 거주민과의 대화와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노벨상 석학의 인터뷰가 한 권에 나란히 실린, 그야말로 더는 입체적일 수 없는 책이다.

화폐를 통한 교환의 개념이 성립된 후 '가격'은 인류에게 가장 뜨겁고 영속적인 주제였다. 가격은 일상과 미래를 결정하는 하나의 강력한 질서, 만물의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중대한 동인이었다. 당장 오늘 점심 메뉴를 뭐로 할지, 그에 앞서 어떤 직업을 가질지, 또 어디에 거주할지, 자녀는 몇 명 낳을지를 결정하는 건 바로 세상의 가격이다. 가격은 삶 너머 죽음도 통제한다.

빈곤의 가격 루퍼트 러셀 지음, 윤종은 옮김 책세상 펴냄, 2만2000원

치료비와 약값을 댈 수 없으면 생명을 포기하기 때문에 사회보장제도 유무가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한 명의 생활인부터 국가의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아니 그 대통령이 통치하는 국가, 나아가 그 정부에 반기를 드는 테러리스트까지도 '가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가격이 급변동하는 시점과 지점이다. 원자재 시장에선 지난 10년간 수차례의 '가격 충격'이 발생했다. 중요한 건 그때마다 폭동 혁명 침략 전쟁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높은 식량 가격은 빵과 물을 달라는 시위대 구호로 이어졌다. 그뿐인가. IS의 모술 함락 소식에 원유가 5% 상승해 2014년 최고치인 115달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식량과 원유 가격이 결정되는 메커니즘을 보이지 않는 손의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믿어왔지만 보이지 않는 손의 합리성은 이미 붕괴됐다.

캘리포니아대로 떠난 저자는 스티글리츠와의 대화를 옮겨 적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발휘하려면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할 법한 조건이 갖춰져야 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하지 않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결정하는 가격의 합리성이란 동화적 상상력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왜 그런가. 저자는 안전자산을 찾는 기관투자자들이 원자재 수요를 좌우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선점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헤지펀드가 가세해 원자재를 먹잇감 삼았다. 이 현상의 근본 원인은 원자재를 금융화한 금융자본주의다. 원자재 가격이 금융상품 가격의 '안'으로 들어가면서 원자재 가격은 물리적 현실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그 현상은 가속화되어 지난 10년간 전 세계의 혼돈을 만들어냈다. 금융자본이 원자재를 하나의 자산군으로 보면서 혼돈의 파도가 들이닥쳤다.

러·우 전쟁도 '원자재 강국'인 러시아의 계략과 불안감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라고 저자는 본다. 2012년 러시아의 파이프라인을 무력화하는 일대 발견이 있었다. 흑해에서 2조3000억㎥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천연가스가 발견된 것이다. 영해의 주인은 바로 우크라이나. 러시아는 채굴권을 두고 우크라이나와 협상하려 했지만 대화는 실패했다. 천연가스 개발과 공급이 현실화되면 푸틴이 유럽에 끼치는 영향력은 몽땅 사라질 판이었다. 원유는 푸틴의 물질적 기반이었다. 저자는 "1980년대 소련이 겪었던 에너지 패권의 붕괴가 재현되는 상황을 푸틴이 잠자코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고 쓴다.

결국 저자는 우리가 눈앞에서 보는 가격이 '전능한 숫자'가 아니며 불평등, 빈곤, 난민, 테러가 금융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본다. 금융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선물 등 파생상품이 위험천만한 현실을 창조했다고 본다. 헤지펀드 매니저, 은행가, 원자재 트레이더를 만난 저자는 금융 투기자들이 벌인 소리 없는 전쟁이 '빈곤의 나비효과'를 만들어냈다고도 주장한다. 그는 이어 말한다. "식량과 연료는 연기금의 안전자산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두운 현실을 직접 걸으며 등불을 밝혀 발굴해낸 문장이 책의 곳곳에 가득하다. "투기로 얼룩진 세계 경제를 광범하고 철저하게 분석했다"(퍼블리셔스 위클리), "경제학 교과서에 깊이 박혀 있는 도그마를 다방면에서 폭로하고 신선하게 재조명했다"(커커스 리뷰) 등의 찬사가 뒤따른 책이다. 원제 'Price Wars'.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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