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뇌과학] 나쁜 기억은 왜 쉽게 잊혀지지 않을까

박형주 한국뇌연구원 한국뇌연구원 신경혈관단위체 연구그룹장 2023. 3. 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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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누구에게나 잊혀지지 않는 나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기억들은 주로 희미해지고 잊혀지기 마련이지만 어떤 기억들은 꾸준히 나를 괴롭힌다. 내 경우 오래 전 먹었던 생굴 때문에 노로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일주일 이상 고통을 받았고 몇 년이 지나도 생굴은 떠올리기만 해도 거부감이 느껴진다.

음식으로 고통 받은 기억으로 같은 음식을 절대 피하는 것보다 더 힘들고 오래 남는 기억도 있다. 외상성 스트레스 증후군(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 환자들은 정말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와 충격을 겪고 나서 그 기억을 지우지 못해 평생 고통을 받는다. 감정적으로 힘든 기억들이 수시로 떠오를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감정 및 신체적 반응을 자극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PTSD 현상은 인지 증강을 꿈꾸고 기억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경고로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의 뇌는 원하는 정보를 어렵게 배우고 쉽게 잊지만 원하지 않는 나쁜 경험들은 제멋대로 오래 남기기 때문이다. 왜 우리의 뇌는 잊고 싶은 기억들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래 간직하고 있을까.

PTSD와 같이 공포 및 스트레스 등 부정적 기억 정보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기억 소멸 (memory extinction)’이라는 기억 조절 메커니즘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생성, 변형, 소멸과 같은 다양한 특징들을 갖고 있으며 공포 기억도 마찬가지다. 연구자들은 기억의 변화무쌍한 특징들을 자세히 파악하고자 실험 동물들을 대상으로 공포 기억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것을 재현하는 방식을 택해 왔다. 공포 조건화(fear conditioning)이라 불리는 행동 측정 기법이 가장 널리 활용되는 것 중 하나다.

생쥐를 이용한 공포기억 조건화 행동기법의 모식도. 네이처 제공

공포 조건화는 생쥐에게 공포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중립적인 외부 환경 또는 자극(예: 특정 장소나 아무 의미 없는 소리 등)들과 생쥐가 매우 아파서 공포를 느낄 정도의 강력한 전기 자극을 함께 동시에 처리, ‘조건화(conditioning)’하는 것이다. 공포 조건화 이후 생쥐는 전기 자극을 주지 않아도 중립적인 자극이 주어지면 극심한 공포 반응을 일으키며, 이는 움직이지 않는 정지 행동(freezing)으로 표현한다.

이는 쥐가 포식자인 고양이나 여우, 매 등을 만나면 역시 극심한 공포를 느낌에 따라 정지 행동을 보이는 것과 같다. 이 조건화는 매우 강력해서 공포 기억을 바로 생성하고 수 주에서 수 개월까지 유지시킬 수 있는데, 실험실 생쥐의 수명이 약 1~2년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꽤 오래 지속되는 공포 기억이다. 공포 조건화에 의해 생겨나는 기억은 PTSD의 가장 단순한 형태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공포조건화에 의한 기억은 인간에게도 쉽게 발견된다. 예를 들어, 당신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침실에 바퀴벌레가 자주 출몰한다면 그 방은 더 이상 편안한 곳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방이 되는 것과 유사하다. 게다가 바퀴벌레가 출몰했던 방과 비슷한 질감의 벽지나 구조, 조명, 냄새 등이 나는 방에 가더라도 예전 기억 때문에 역시 거부감이 느껴질 수도 있다.

이제 생쥐들에게 공포 조건화에 사용되었던 (더이상 중립적이지 않은) 환경 및 자극을 고통을 주는 전기 자극 없이 반복적으로 노출시켜보자. 그러면 새로운 ‘학습’이 발생한다. 생쥐들은 이제 조건화에 사용되었던 그 환경 또는 자극이 과거에 경험했던 고통의 전기 자극과 무관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인간도 역시 바퀴벌레가 완전히 제거되어 더 이상 벌레가 없는 안심할 수 있는 방이라는 것을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확인하게 되다면, 그 공간에서 안심하고 지낼 수 있다. 그럼 우리는 그 침실에 대한 공포기억이 ‘소멸’ 또는 ‘망각’ 되었다고 부른다. 이처럼 원래의 공포기억 소멸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요소와 공포와 상관없는 자극들이 더 이상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새롭게’ 배우는 것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기억의 소멸을 새로운 학습의 결과 기존 기억을 방해하는 새로운 기억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포기억이 새로운 기억으로 방해되어 소멸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증거는 다른 현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생쥐가 공포조건화를 통해 습득한 공포 기억을 소멸시킨 이후라도 공포와 상관없는 새로운 중립적 환경에 노출된다면 다시 공포가 복구(recovery)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공포 기억의 재생성(renewal)이라 부르며, 이러한 현상이 관찰되는 이유도 역시 기존의 공포기억 정보와 이를 ‘억제’하는 새로운 억제 기억 정보가 경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쥐의 공포 억제성 기억은 기존과 전혀 다른 새로운 자극 또는 환경에 노출되면 다른 기억 정보에 의해 또 억제됨으로써 원래의 공포기억이 되살아 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처럼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다양한 기억 정보들이 서로 경쟁하며 뇌 속에 존재하고 있고 필요에 따라 원하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끄집어 낼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방식의 기억의 경쟁은 다양한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데 유리할 것으로 보인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PTSD 환자들이 겪는 ‘사라지지 않는 공포기억’은 이러한 공포기억의 소멸을 가능케 해주는 억제성 기억의 새로운 학습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그 기억들을 소멸시키기 위해 자신이 그 자극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도 않고 불안하게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새롭게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기억 처리 메커니즘은  다양한 종류의 공포기억을 형성하는 데에도 방해가 된다.

미시간 대학 리베르존 (Israel Liberzon) 교수 연구팀이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을 대상으로 fMRI를 활용한 연구(10.1523/JNEUROSCI.4287-13.2014)에 따르면, PTSD로 진단된 참전 군인들은 정상 참전 군인과 달리 과거 공포기억과 상관없는 새로운 위험 환경에 대한 신체적 공포 반응도 낮았고 그에 연관된 새로운 공포 기억도 잘 만들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위협적인 환경과 자극을 만나면 새로운 공포기억을 만들게 된다. 새로운 공포기억은 기존의 공포기억과 다른 정보를 담기 때문에, ‘위협’과 ‘공포’라는 유사한 감정반응들을 자극하더라도 우리는 공포를 일으키는 여러 정보들을 모두 구분하여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동물이 다양한 위협상황에 대처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진화적으로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PTSD와 같이 기억을 다양하게 처리하는 기전에 문제가 생기면 공포기억은 고착화되고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요인들이 PTSD를 일으킬까.  여러 주요 단서 중 하나가 극심한 ‘스트레스’이다. 스트레스는 심지어 정상인들도 PTSD 환자처럼 기억 소멸을 방해할 수 있다. 뉴욕 대학의 펠프스 (Elizabeth Phelps) 교수 연구팀은 정상인 127명을 대상으로 손목에 고통을 느낄 정도의 약한 전기자극을 주면서 고통 및 공포와 상관없는 중립적인 그림을 보여줌으로써 조건화 된 공포기억을 생성시켰다.

이 때 얼음물에 손과 팔을 담그게 하여 약한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들은 생성된 공포기억의 소멸을 유도할 경우 소멸 정도가 현저히 낮아졌으며, 결국 공포기억이 대조군보다 높게 유지가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https://doi.org/10.1016/j.nlm.2014.01.015).

기억 소멸을 ‘학습’하는 여러 뇌 부위 중 하나가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인데, 스트레스 등과 같은 기억 소멸 또는 공포기억의 ‘억제기억’ 형성을 저해하는 요소들이 전전두피질의 기능 저하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극심한 공포와 고통에 의한 과도한 스트레스가 전전두피질을 비롯한 여러 기억관련 뇌 부위의 기능에 영향을 미쳐 정상적인 학습과 기억 과정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기억의 소멸되지 않는 현상을 정상적인 실험동물에서도 구현한 사례를 통해 기억의 유연성을 담당하는 분자기전도 추측해볼 수 있다. 매우 다양한 방향의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 중 한 예를 들자면 2008년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 필립스(Anthony G Phillips) 교수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가 있다(doi.org/10.1038/sj.npp.1301642).

이들은 정상 생쥐에서 흥분성 신경세포간 신호 전달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막 단백질 중 하나인  α-amino-3-hydroxy-5-methyl-isoxazole-4-propionic acid (AMPA) 수용체가 세포내이입화(endocytosis) 되는 것을 방해하였더니, 공포 조건화에 의한 공포 기억 형성은 정상이었지만 공포 기억의 소멸만 선택적으로 감소하게 되었다는 결과를 보고한 바가 있다.

AMPA 수용체의 세포내이입화는 신경세포간 시냅스 전달도가 오랫동안 감소하게 되는 장기 시냅스 저하(long-term depression; LTD)를 매개하는 기능을 갖고 있으며, 다른 연구들에서도 AMPA 수용체 세포내이입화 오류 및 기타 분자적 변화에 의해 문제가 생겨 장기 시냅스 저하에 문제가 생길 경우 이미 형성된 기억을 대체하는 새로운 기억 형성에 문제가 생긴다고 보고한 바 있다.

따라서 PTSD 환자들은 스트레스 등에 의해 신경세포간 신호 전달의 가소적 변화를 조절하는 특정 분자기전이 비정상적으로 변화하였고, 이것이 기존의 기억과 다른 새로운 기억의 형성을 막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PTSD와 같은 비정상적 기억 형성 및 소멸의 원인을 뇌 속에서만 찾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탠포드 대학의 다이서로스(Karl Deisseroth) 교수 연구팀은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감정’의 근원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연구 결과를 올해 3월 '네이처(Nature)'지에 발표하였다.

일반적으로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외부 환경 및 자극은 감각신경계를 타고 뇌로 전달되며, 뇌에서는 감정과 관련된 영역에서 감정 신호를 발생하여 자율신경계 등을 통해 신체에 이를 전달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공포 등의 부정적 감정은 뇌에서 느껴진 후 결국 신체로 전달되어 심박수 증가, 근육/혈관/피부 조직의 변화 등을 유도한다.

그러나 다이서로스 연구팀은 불안 및 공포 반응은 뇌에서 일방적으로 신체에 전달하는 신호체계 말고도 신체에서 뇌로 전달되는 감정 신호체계가 존재하며, 이에 따라 신체-뇌 상호작용이 발생하여 부정적 감정이 표현된다는 증거를 제시하게 된 것이다(doi.org/10.1038/s41586-023-05748-8). 

연구팀은 광유전학 기술을 통해 스트레스를 받은 상황과 유사하게 인위적으로 생쥐의 심장 빈맥, 심장 박동수가 급격하게 증가되도록 유도하였는데, 전기충격이 가해질 때와 같은 위협적인 환경에서만 선택적으로 광유전학에 의한 인위적 심장 빈맥이 생쥐의 불안 및 공포 반응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광유전학 기술을 활용한 인위적 심장 빈맥 유도와 그에 따른 불안 행동 증가. 네이처 제공

이는 외부 환경에 의한 스트레스 등에 의해 유도된 심장 박동 변화가 뇌 내 감정 관련 활성들과 합쳐져서 최종적으로 불안과 공포 반응으로 표현될 수 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연구진은 후섬피질(posterior insular cortex)을 이러한 신체-뇌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뇌부위로 제시하였다.

왜냐하면, 후섬피질의 활성이 위협적 환경 하에 심장 빈맥이 유도될 때 크게 증가한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반대로 후섬피질의 활성을 광유전학적으로 억제하면 위협 환경 및 인위적 심장 빈맥에 의한 불안행동들이 유의미하게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는 PTSD와 같은 기억 관련 장애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뇌 속의 학습과 기억 관련 기전들을 자세히 파헤침과 동시에 뇌-신체 상호작용에 의한 다양한 기억 조절 메커니즘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부정적 기억이 잘 지워지지 않는 이유가 이러한 뇌-신체 상호작용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인지 아니면 모든 종류의 기억들에게도 이러한 유사하면서도 서로 다른 방식의 뇌-신체 상호작용이 관여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하지만 이처럼 학습과 기억의 새로운 면모들을 계속 파헤쳐 나가다 보면  특정 기억들이 다른 기억들보다 더 단단하게 우리 머릿속에 남아있는지 이유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박형주 한국뇌연구원 한국뇌연구원 신경혈관단위체 연구그룹장

※필자소개

박형주. 한국뇌연구원 신경혈관단위체 연구그룹에서 근무 중이며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뇌인지과학전공 겸임교수다. 현재 생쥐 모델을 활용해 학습과 기억을 조절하는 세포간 상호작용의 분자 기전을 연구하고 있으며, 뇌 속 기억 형성 및 변화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일반인들에게 소개하는 저술 작업도 같이하고 있다.

[박형주 한국뇌연구원 한국뇌연구원 신경혈관단위체 연구그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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