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ㅊㅋㅌㅍ’ 사라진 세상… 미래도 과거도 아닌 세계… 언어의 경계·지적 한계 넘어선 ‘배명훈 월드’[북리뷰]

박동미 기자 2023. 3. 2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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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지음│북하우스
SF작가 배명훈 7년만에 소설집
팬데믹 · AI시대 살며 얻은 영감
‘돈쓰는 로봇’ 등 참신한 소재로
고유의 영리함과 유머 돋보여

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일은 인공지능(AI)이 한다고 하면, 인간은 주로 뭘 하며 지낼까. 기회니 재앙이니 말은 넘치지만, ‘AI 시대’를 열심히 설파하는 이들도 크게 고민하지 않는 이 질문에 대신 답하는 소설이 있다. AI가 인간의 생산활동 대부분을 전담하고, 예술 영역까지 점령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배명훈 작가의 소설 ‘수요 곡선의 수호자’에서는 심해도시 건설 책임자인 인간 ‘유희’가 대부분의 여가를 ‘명상’을 하며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AI는 모르는 ‘깨달음’이나 ‘희열’과 같은, 고도의 마음 수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인간 고유의 감정에 더욱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SF ‘개척기’에 등장해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는, 그래서 이제는 ‘황금기’의 상징이 된 배 작가가 7년 만에 소설집 ‘미래과거시제’를 펴냈다. 인류의 가장 최신 화두인 AI를 다룬 ‘수요 곡선의 수호자’를 비롯해 감염병 경로인 침방울 차단을 위해 파열음이 제거된 세계를 그린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시간 여행을 둘러싼 한 연인의 사랑스러운 미스터리 ‘미래과거시제’, 로봇 전투담을 판소리 형식으로 시도한 ‘임시 조종사’ 등 팬데믹 시기를 겪으며 지난 3년간 작가가 질문하고, 상상하고, 스스로 답해 본 9편의 이야기가 실렸다.

소설집은 경계 너머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 그 자체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흥미로운 실험을 한다. 장르의 특성상 이어지는 시간과 공간의 실험뿐만 아니라, 때로 독자들은 아주 독특한 ‘말의 실험실’에 서 있게 된다. 작가는 시간, 공간, 그리고 언어까지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SF의 미덕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예컨대, 표제작인 ‘미래과거시제’를 보자. 소설 속 화자의 옛 연인은 미래도 과거도 아닌 ‘이상한’ 화법을 썼다. 미래를 일어났던 과거처럼 말하는 식으로, 소설은 이를 ‘미래과거시제’라 부른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믿는 우리의 세계에선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시제다. 또, 팬데믹이 영감을 준 게 분명한 ‘차카타파의 열망으로’에서는 ‘발음’을 실험한다. 일상에서 파열음이 제거되는 걸 상상해 본 적 있는지. 소설 속 세계는 ‘ㅊ·ㅋ·ㅌ·ㅍ·ㄲ·ㄸ·ㅉ·ㅃ’이 없다. 소설 자체도 그렇게 쓰였다. 꽃은 ‘곶’, 카타르시스는 ‘가다르시스’로. 해독 수준으로 읽어야 하지만, 그 자체가 재밌고, 묘한 몰입감을 주며, 말로 표상되는 세계, 즉, 인류가 팬데믹 시간 동안 겪은 삶과 언어와 변화한 세계에 대한 성찰로 나아간다.

이번 책에서 보이는 ‘배명훈 월드’는 특유의, 그리고 고유의 영리함과 유머를 오롯이 담고 있고, 시선은 더 깊어졌다. 여기에,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은 기발함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한데, 이미 정보라·정세랑·곽재식 등 수많은 동료 작가들이 극찬한 이번 소설집에 동어반복의 칭찬을 얹는 대신,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배 작가는 왜 자꾸 지금의 세계를 넘고, 지금의 언어를 넘는 ‘지적인 탐험’에 우리를 동참시키는 걸까. 생산 중심의 로봇이 모든 산업과 문화를 지배한 세계를 그린 ‘수요 곡선의 수호자’를 읽다가, 어렴풋이 그 의도가 탐지됐다. 로봇이 분당 2000곡을 작곡하고 소설도 시도 다 쓰고, 세상에 좋은 게 차고 넘치는 공급 과잉 AI 시대. 반대로 이를 상쇄하기 위한 ‘수요’ 로봇이 만들어진다. 한마디로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돈만 쓰면’ 되는 로봇인 셈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지 않자, 과학자들은 다시 연구한다. AI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공포, 슬픔, 기쁨. 지옥훈련 끝 그 마음들을 학습한 로봇 ‘마사로’는 존재의 존엄과 순수한 열망에 ‘마음껏’ 가닿는다.

배 작가를 따라나선 탐험의 끝에 이 장면을 만나 뭉클해지면, 작가가 끊임없이 넘어가고자 하는 ‘선’이, 우리가 반복해서 목격하게 되는 ‘실험’이 조금 이해된다. 그러니까, 세상의 숱한 ‘야만’에도, 우리는 삶을 잃지 않고 가꾸고 “인연과 연결과 사랑에 대한 깊은 희망”(정보라 작가)을 품고, 또 기대해야 한다는 것. 할 수 있다는 것. 작가 역시 “우리는 여전히 진실이나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으니. 그런데, ‘돈 쓰는 로봇’은 진짜 기막힌 아이디어 같은데, 언젠가 꼭 보고 싶다. 344쪽, 1만68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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