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규모 금융 완화의 세 가지 부작용 [글로벌 현장]

입력 2023. 3. 2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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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면 대규모 금융 완화 10년…빈부 격차 확대부터 좀비 기업 양산까지
[글로벌 현장]

2013년 3월 취임한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역대 최장기간 재임하면서 금융완화와 초저금리 정책을 고수했다. (사진=연합뉴스)


일본인들이 밥반찬으로도, 술안주로도 즐겨 먹는 된장 고등어 통조림. 전날 공장에서 출고된 통조림 값은 300엔인데 3개월 전에 만들어진 통조림 값은 100엔, 6개월 전의 통조림 가격은 200엔이라고 가정하자.

통조림 회사는 어떤 가격을 기준으로 제품을 생산해야 할까. 소비자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제조일이 불과 3개월 다를 뿐인데 가격 차가 3배나 되는 통조림과 이 통조림을 만든 회사를 신뢰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격이 뒤죽박죽인 통조림 가격은 대규모 금융 완화 10년째를 맞아 부작용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일본 금융 시장을 상징한다.2013년 3월 취임한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한 달 뒤인 4월 대규모 금융 완화를 시작한 지 10년을 맞았다. 이례적인 금융 정책을 장기간 펼치면서 일본에서는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2월 회사채 발행액이 ‘제로’인 이유


일본 금융 시장 전문가들은 대규모 금융 완화의 부작용을 크게 3가지로 분석한다.

작년 12월 20일 일본은행은 국채 수익률 곡선 왜곡을 해소하기 위해 장기 금리의 변동 폭을 0.25%에서 0.5%로 확대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정이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깜짝 결정’을 내린 지 두 달이 지났지만 만기가 더 짧은 국채 금리가 만기가 긴 국채 금리보다 높은 국채 수익률의 왜곡 현상은 여전하다. 8~9년(잔존 만기) 만기 국채의 금리(0.6%)는 10년 만기 국채 금리(0.5%)를 웃돌고 있다. 2월 21~22일에는 이틀 연속 10년 만기 금리가 상한 폭인 0.5%를 넘어섰다. 

수익률 곡선 왜곡은 국채 금리가 전반적으로 높은 가운데 일본은행이 통제하는 10년 만기 국채 금리만 0.5%에 묶여 움푹 꺼져 있는 모습을 말한다. 일본은행이 2016년 9월부터 단기 금리와 장기 금리 두가지를 통제하는 장·단기 금리 조작(YCC)을 실시하는데 따른 대표적인 부작용이다.

국채 수익률 곡선의 왜곡 때문에 기업은 회사채를 발행하는데 애를 태우고 있다. 발행 금리의 기준이 되는 국채 금리가 뒤죽박죽이다 보니 발행 금리를 확정하지 못해서다. 2월 회사채 발행액은 ‘제로(0)’였다. 기업들이 4분기 결산 발표를 마무리하는 2월은 회사채 발행이 증가하는 시기지만 기업들은 자금을 제때 조달하지 못하고 있다.

대규모 금융 완화의 첫째 부작용은 이처럼 채권 시장의 기능을 망가뜨린 것이다. 만기가 다른 국채 금리만 뒤죽박죽인게 아니다. 통조림을 예로 들었지만 만기가 같은 국채, 즉 똑같은 상품의 금리도 제멋대로다.

지난 1월 말 새로 발행한 10년 만기(2032년 12월 상환) 국채 금리는 0.475%였다. 불과 3개월 앞서 발행한 10년 만기(2032년 9월 상환) 국채 금리는 0.165%에 불과했다. 이보다 3개월 앞선, 즉 2032년 6월이 상환일인 10년 만기 금리는 0.3% 수준으로 두 배 정도 더 높았다.

같은 상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격이 제각각인 것은 일본은행이 이 시기에 발행된 국채를 거의 100% 사들인 때문이다. 시장에 유통되는 채권의 씨가 마르다 보니 수요가 조금만 변해도 가격이 널뛰기하는 것이다. 증권사들의 1일 평균 국채 매매 대금이 2015년에 비해 80% 급감한 데서도 유통 물량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 수 있다.

결국 대표적 글로벌 국채 지수인 ‘FTSE 세계 채권지수(WGBI)’는 올해부터 일본 10년물 국채를 부분적으로 제외하기 시작했다. 유통량이 불충분하다는 이유에서다. 스즈키 마코토 오카산증권 선임 전략가는 “가장 활발하게 거래되기 때문에 일본 국채의 가격 움직임을 대표하는 10년물이 세계 주요 채권지수에서 제외되는 이례적인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주요 채권지수에서 제외되면 연기금 등 글로벌 큰손의 투자 대상에서도 빠지게 된다. 일본 국채 시장에 해외 자금의 유입이 끊길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주가 급등 이익은 부유층에게만 


대규모 금융 완화 10년의 둘째 부작용은 빈부 격차다. 일본은 빈부 격차가 매우 작은 나라다. 소득세와 상속·증여세가 세계적으로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빈부 격차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빈부 격차를 나타내는 수치.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고 ‘1’에 근접할수록 불평등함을 나타낸다)가 1990~2017년 0.36~0.39로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했다. 지니계수만 놓고 보면  대규모 금융 완화가 일본의 빈부 격차를 키웠다고 말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계층별 자산 변화를 따져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오시오 다카시 히토츠바시대 경제연구소 교수는 가계 구성원이 2인 이상인 세대를 금융 자산 수준에 따라 9단계로 나눠 20년 동안의 자산 변화를 비교했다.

2021년 금융 자산이 3000만 엔을 넘는 부유층이 전체 자산의 59.7%를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금융 자산에서 부유층이 보유한 자산의 비율이 2002년보다 8.2%포인트 늘었다. 2002~2012년 부유층 보유 자산의 증가 폭이 2.4%포인트였던 반면 2012~2021년은 5.7%포인트로 대규모 금융 완화 이후 부유층에 부가 더 집중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내각부가 일본인의 가계를 총자산 보유 규모에 따라 10단계로 나눠 분석한 조사에서도 2019년 기준 최상위층의 평균 자산은 1억3511만 엔으로 2014년보다 1030만 엔 늘었다. 반면 자산이 가장 적은 계층은 거꾸로 부채가 215만 엔 늘었다.

대체로 자산이 많은 계층은 유가증권의 보유 비율이 높은 반면 자산이 적은 세대는 예금과 적금 비율이 높다. 대규모 금융 완화로 주가가 급등한 이익은 부유층에 돌아가고 초저금리로 인해 예·적금 이자가 제로 수준으로 줄어든 손실은 서민층이 고스란히 떠안은 결과다.

대규모 금융 완화의 셋째 부작용은 좀비 기업을 양산하는 것이다. 2021년 도산한 기업(부채 1000만 엔 이상)은 5980개로, 1964년 이후 57년 만에 가장 적었다. 대규모 금융 완화 직전인 2012년만 해도 한 해 1만1719곳의 기업이 문을 닫았다. 실적이 나빠 진작에 문을 닫았을 기업들이 손쉽게 자금을 조달해 연명한 때문이다. 대규모 금융 완화가 부른 초저금리 덕분이다. 

영업이익으로 부채 이자도 갚지 못하는 기업을 좀비 기업이라고 부른다. 장사를 해봐야 빚이 늘기만 하니까 문을 닫는 게 나은 기업이다. 금융 조사 회사 데이코쿠데이터뱅크는 2021년 말 기준 데이터 분석이 가능한 일본 기업 147만 곳 가운데 12.9%인 18만8000곳이 좀비 기업이라고 밝혔다. 일본 기업 10곳 가운데 한 곳 이상이 좀비 기업인 셈이다.

세무법인 A앤드파트너스의 시바누마 나오히코 매니저는 “시장에서 퇴출돼야 할 기업이 살아남아 저가 수주로 연명하기 때문에 과도한 가격 경쟁이 일어난다”며 “결과적으로 모든 기업들이 성장하기 어렵게 된다”고 아사히신문에 지적했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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