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채운 항구, 노래로 감싼 도시…눈물 넘어 사랑이 된 타임슬립 목포[투어테인먼트]

강석봉 기자 2023. 3. 24.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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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와 그 앞바다 다도해 풍경. 사진제공|목포시


항구는 땅을 끝내고 바다를 연다. 눈물은 시름을 씻어내고 미소를 예비한다. 목포에 서서 누란의 격동기를 버텨낸 건물은 여전하지만, 눈물에 씻겨 ‘아롱 젖은’ 기억이 됐다.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리워 찾는 오늘 목포 사랑 여행.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목포대교와 목포의 야경. 사진제공|목포시


기차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목포에 다다랐다. 1905년 경부선(서울-부산), 1906년 경의선(서울-신의주)에 이어 1914년 호남선(대전-목포)과 경원선(용산-원산)이 놓였다. 110년 전 한반도엔 그렇게 기찻길로 X자의 낙인이 찍혔다.

목포행 기차에는 우리 민초의 땀과 눈물, 나아가 우리의 골육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기차의 기적 소리는 민초들의 비명이었고, 그들이 내뿜는 연기는 민초들의 한숨이었다. 그 수탈 품은 다시 배에 실려 일본으로 옮겨졌다. 목포항은 부산·인천항과 달리 1897년 우리 손으로 개항했지만, 끝내 수탈의 창구가 돼 버렸다.

보리마당에서 바라본 목포항과 서산동 시화골목. 사진제공|목포시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으로 시작되는 이난영의 이 노래가 원제목 ‘목포의 사랑’에서 ‘목포의 눈물’로 바뀐 데는 어찌보면 다 이유가 있었다.

거친 숨을 감추고 멈춰선 기차처럼 더이상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목포라는 땅끝을 붙들고 섰다. 그나마 일이 있어 다행이지만 시름을 떨치기는 쉽지 않다. 마실 물보다 들이켤 술이 넘쳐나니, 산낙지의 다리를 물어뜯어 화풀이하고 곰삭은 홍어의 톡 쏘는 맛에 의지해 고단한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일제 시대 지어진 붉은벽돌 창고. 사진|강석봉 기자


그 한탄이 얼마나 단단했는지, 오늘 목포에는 당시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다. 목포 화신백화점이며, 붉은 벽돌 창고·구 갑자옥모자점 등이 그곳이다. 이 중 창고는 호남선 개통 이후 세워진 것으로, 일본식 벽돌 쌓는 방식과 박공(八자 모양)지붕 형태를 볼 수 있다. 더불어 1920년 우리 민족 자본에 의해 세워진 호남은행 목포지점은 리모델링돼 현재 ‘목포 대중음악의 전당’으로 변신했다. 이 동네의 BGM(배경음악)이 된 ‘목포의 눈물’ 등 각종 음악·예술 관련 전시물을 확인할 수 있다.

1920년 우리 민족 자본에 의해 세워진 호남은행 목포지점은 현재 리모델링돼 ‘목포 대중음악의 전당’으로 변신했다. 사진|강석봉 기자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조선시대 세워진 목포진. 사진제공|목포시.


목포는 한국관광공사의 한국관광 100선 중 스토리텔링 코스로 꼽혔다. 목포는 우리 근대역사문화와 근대 가요사에 수많은 스토리가 출발한 곳이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목포 선창가 지역 건물 하나하나에 대한제국 시대,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의 이야기가 녹아 있다.

목포 근대역사관 제1관으로 드라마 ‘호텔 델루나’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사진제공|목포시


1930년대 대중가요의 시초 이난영, 목포의 모던 보이 김우진과 연인 윤심덕의 발자취가 이곳에 아련하다.

목포 유달동과 대성동에 서면 영화세트장 같은 인상을 받는다. 건물이 멈춰선 곳에 시간만 홀연히 흘러왔다. 건물 하나가 아니라 동네 전체가 그러하다. 이런 덕에 이곳은 통째로 문화재(등록문화제 제718호)로 됐다. 건물·골목·거리 등 11만4038㎡가 등록문화제다.

목포의 근대문화를 돌아보는 코스는 목포진→꼼지락작업실→근대역사관 제1관→근대역사관 제2관(현재 휴관 중)→경동성당→유달초등학교 등이다. 목포진은 조선 시대 이곳에 설치된 수군의 진영이다. 이곳에 서면 목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근대역사관 제1관은 구 일본영사관 건물로 드라마 ‘호텔 델루나’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건물 뒤로 일제 말기에 조성된 방공호도 체험할 수 있다. 영화 ‘1987’의 배경이 되기도 한 시화 골목의 ‘연희가게’ 등은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 이곳에선 과거 ‘불량식품’으로 불리던 목포 쫀드기를 맛볼 수 있다.

영화 ‘1987’의 배경이 된 서산동 시화골목 입구_연희네슈퍼. 사진제공|목포시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1920년 우리 민족 자본에 의해 세워진 호남은행 목포지점은 현재 리모델링돼 ‘목포 대중음악의 전당’이 내부 모습. 사진|강석봉 기자


모던보이는 김우진에게 목포는 노스텔지어였다. 목포 유력자의 아들인 그는 가업을 잇기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났지만, 예인의 길을 가기 위해 와세다대학 영문과로 전과했다. 당시 일본에서 만난 윤심덕과 ‘사의 찬미’를 녹음 후 귀국길에 바다에 투신했다. 극적 스토리 때문일까. 이 노래는 대박을 쳤고, 이들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극작가로 활동했던 김우진은 시 49편, 희곡 5편 등을 남겼다.

그에 비해 이난영의 흔적은 목포에 차고 넘친다. 스스로 훌륭한 가수로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를 불렀다. 난영은 예명으로, 본명은 옥례인데, 호적과 학적부엔 옥순으로 기록돼 있다.

‘목포의 눈물’은 건전가요 냄새가 물씬 난다. 이 노래는 1935년 오케이레코드가 전국 10대 도시를 대상으로한 ‘제1회 향토찬가’ 공모전을 통해 당선된 가사로 만들어졌다.

목포해상케이블카 야경_목포대교 배경. 사진제공|목포시


1937년 연주자이자 작곡가·가수로 활동한 김해송과 결혼한 이난영은 제작자로 전설을 만들기도 했다. 자신의 딸 2명과 오빠 이봉룡의 딸 1명으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를 만들어 미국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김시스터즈는 1959년 미국의 흥행업자 톰 볼과 전속계약을 맺고 후, TV ‘설리반쇼’에 33회 출연하는 등 인기를 끌었다.

1965년 생을 달리한 이난영의 육신은 삼학도에 배롱나무 수목장 형태로 잠들어 있다. 난영공원에는 이난영나무, ‘목포의 눈물’·‘목포는 항구다’ 노래비가 있다.

이난영의 모습은 이난영&김시스터즈 전시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북교동예술인 골목에 있는 화가의 집 내에 이관했다. 전시관에는 이난영과 가족의 유품·유물 자료 등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소장돼 있다.

북교동예술인 골목에 위치한 화가의 집 내에 있는 이난영전시관 전시품. 사진|강석봉 기자.


어찌타 옛상처가 새로워진다


목포 해상케이블카. 사진제공|목포시


전설의 예인뿐만이 아니라 목포 자체를 소재로 한 노래가 100곡을 넘는다. 목포가 품은 문화적 영향력은 힘이 세다.

인근 영암에는 한국트로트가요센터가 있다. 트로트의 역사는 물론, 수많은 가수의 스토리, 노래 연습장 등 보고 듣고 즐길 거리가 넘친다.

구 목포부림병원 관사는 카페가 됐다. 카페 행복이 가득한 집은 실내의 일본식 목조 계단, 천장의 목조 장식, 일본식 정원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고급주택의 복잡한 지붕구조를 가지고 있다.

해상케이블카가 연결된 이순신 장군의 ‘상유십이’를 형상화한 건물. 사진|강석봉 기자


목포 인근을 조망하기엔 목포해상케이블카가 제격이다. 북항스테이션을 출발해 유달산 정상부에서 ‘ㄱ’자로 꺾여 해상을 지나 반달섬 고하도까지 편도 총 3.23㎞를 잇는다. 왕복 40분이 소요된다. 고하도에서 강변 데크길을 이용해 목포대교까지 걷는 것도 좋다. 고하도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상유십이’를 형상화한 건물도 이채롭다. 이곳에 오르면 바다 바람과 주위 풍경이 마음을 뺏는다.

백운동 모습. 사진|강석봉 기자


목포 인근 강진의 백운동 정원도 들러볼 만하다. 백운동은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 위로 올라가는 마을’이란 뜻이다. 이런 때문인지 이곳에서 바라본 월출산의 전경이 아름다움을 넘어섰다. 조선 중기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힌 처사 이담로가 들어와 ‘백운동’이라 이름 짓고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섞어 만든 마을로, 힐링 여행지다. 다산선생이 1812년 이곳을 다녀간 뒤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제자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백운동 원림의 12승경을 노래한 시문을 남겼다. 현재의 건물은 이를 근거로 지었다.

강진 백운동 입구에서 바라본 월출산 전경. 사진|강석봉 기자


강석봉 기자 ks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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