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배송 한도 올리자…3천냥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책&생각]

한겨레 2023. 3. 2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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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출판을 시작한 지 1년 남짓 된 한 출판사 대표와 진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출판사 대표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책의 정가를 교묘하게 잘 매겨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하면서, 최근 온라인 서점들이 무료배송하는 책의 가격 기준을 1만5000원으로 인상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에 대해 전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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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5천원 무료배송 기준 생겨나자
모자란 한도 채울 2천~3천원책 급소진
한 인터넷 서점 누리집이 올린 \

며칠 전 출판을 시작한 지 1년 남짓 된 한 출판사 대표와 진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번역가 출신인 출판사 대표는 자신이 발굴한 영국 문학 작품을 꾸준히 소개하고 싶다며 의욕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출판사 대표가 읽어보라며 건네준 책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조건 소장하고 싶을 만큼 멋진 책이었다. 색감이 화려한 양장 표지는 종이가 아닌 천으로 제작한 느낌이 났다. 책의 정가는 1만7200원, 인터넷 서점 10% 할인을 적용하면 1만5480원에 판매되고 있었다. 출판사 대표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책의 정가를 교묘하게 잘 매겨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하면서, 최근 온라인 서점들이 무료배송하는 책의 가격 기준을 1만5000원으로 인상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에 대해 전해줬다.

지난달부터 예스24를 시작으로 알라딘, 교보문고 등 국내 온라인 서점들이 무료배송의 기준을 1만5000원으로 일제히 인상했다. 배송료도 기존 2000원에서 2500원으로 올렸다. 요즘 “오르지 않으면 뭔가 이상하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니, 온라인 서점의 배송료와 무료배송의 기준이 오르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온라인 서점의 변경된 배송료 정책으로 인해 예상치 않은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2021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단행본 도서의 평균 가격은 1만7116원이다. 온라인 서점 10% 할인을 적용해 보면, 실제 판매가는 1만5000원을 겨우 넘길 정도다. <불편한 편의점> 1만4000원, <아버지의 해방일지> 1만5000원, <이토록 평범한 미래> 1만4000원 등,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대부분 소설책의 정가는 단행본 도서 평균 가격을 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제 온라인 서점에서 소설책 한 권을 사려면, 책값 외에도 2500원의 배송료를 별도로 내야 한다는 말이다.

가뜩이나 제작비 인상으로 정가 인상을 고민하는 출판사들에 엉뚱한 고민이 하나 더 늘어났다. 이제는 책의 가격을 결정할 때 온라인 서점의 무료배송 기준인 1만5000원(10% 할인적용)을 신경 쓸 수밖에 없게 됐다. 소비자로서는 온라인 서점에서 읽고 싶은 책을 하나 골라 주문하려는데 배송료 2500원이 별도로 붙는다고 하면 주저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출판사로서는 책의 정가를 올려서라도 소비자들이 무료배송의 혜택을 보도록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온라인 서점의 무료배송 기준이 인상되면서 어부지리를 톡톡히 챙기는 책들이 등장했다. <수레바퀴 아래서>(코너스톤), <데미안>(코너스톤), <초판본 동물농장>(더 스토리), <초판본 어린 왕자>(더 스토리) 등, 3000원 내외의 초저가 책들이다. 저작권이 소멸된 작품들만 골라 짜깁기식으로 만든 책들이 애매하게 무료배송의 기준선에 걸린 책들의 구세주 역할을 하면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가 있다. 배송료 2500원을 내느니 차라리 초저가 책을 하나 더 사서 무료배송의 기준을 채우려는 소비자들의 ‘합리적인’ 판단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다.

“저는 정말 영혼을 갈아 넣는 기분으로 원고를 번역했고, 독자들의 마음에 다가가기 위해 열심히 이 책을 만들었는데요. 너무도 혼탁해진 시장 상황에서 앞으로 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바보같이 출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이 일이 너무 재미있으니 어쩌죠?” 고군분투하며 정성 들여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출판사 대표의 말이 긴 여운으로 남는다.

홍순철/BC에이전시 대표·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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