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하의 대중문화평론] 기다릴게, 연진아

유강하 2023. 3. 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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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연진이’가 ‘동은이’에게 용서를 구하는 날까지
서른일곱에 되찾은 열아홉살
드라마 속 동은의 삶과 달리
현실, 비리고 텁텁한 맛만 남아
여정·현남 같은 조력자도 없이
현실 피해자 비극적 벼랑 내몰려
피해자들 진심으로 원하는 건
가해자가 사죄·용서 구하는 일
모든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
불가능·미련해 보이는 희망이자
버릴 수 없어 기다리는 바람같아

“연진아”

지난 두 달 동안, 가장 많이 회자되었던 유행어 가운데 하나는 “연진아”였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애타게 불렀을 연진이는, 드디어 2023년 3월 10일 오후 5시에 넷플릭스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연진이와 동은이를 기다리는 시간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창조적이고 풍부한 시간이었다. 그 드라마가 관심을 불러일으킨 만큼 대중들의 관심은 컸고, 사람들은 마냥 손을 놓고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복수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각자의 시나리오를 써 내리고, 그걸 다시 소비했다. 그야말로 상상에 상상이 더해지는 창조적인 시간이었다.

신났던 것 같다, 대중들은. 가해자가 분명하고, 피해자가 복수를 바라고 있다는 작은 힌트만으로도 어떻게 하면 가해자에게 시원한 복수를 시전할 수 있는지 상상하고, 그걸 또 다른 작은 드라마로 만드는 과정이.

‘더 글로리’ 파트1이 끝나고, 혹시 주인공의 손에 피를 묻히는 복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염려는 기우였다. 성처럼 견고할 것 같았던 가해자들의 연대는 유리처럼 연약하게 부서지며 서로를 폐허로 만드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서로 죽이고, 옭아매고, 결국 죽거나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동은의 마음이 얼마나 편안해졌는지 모르겠지만,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가 “사랑해요”였다는 게, 작은 위로가 된다.

김은숙 작가는 학교폭력에 대한 딸과의 대화가 장르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동기를 밝혔다. 아이가 죽도록 맞고 오면 가해자들을 지옥 끝까지 끌고 갈 돈이 자신에게는 있지만, 세상의 많은 동은이와 부모들이 모두 작가 자신처럼 돈이 많지 않을 거라는 현실적인 얘기를 하면서, 그분들을 응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후반부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뻥 뚫리게 할 통쾌한 복수극으로 이어진다. 학폭으로 삶이 부서져, 열여덟에 멈추었던 동은의 시간은 복수가 완성된 후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서른일곱 살에 비로소 열아홉 살을 카운트할 수 있었던 동은의 삶에 안도하고 응원을 보내게 되지만,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사이다 맛과 마라 맛은 없고 온통 비리고 텁텁한 맛만 남은 현실의 문이 다시 열리면, 고통은 배가 될 것 같다. 문동은처럼 용기를 낼 수 없고, 주여정(이도현 분)이나 강현남(염혜란 분)과 같은 조력자가 없는 현실에서는 드라마와 같은 시원한 맛은 기대하기 어렵다. 마치 얼마 전에 있었던,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논란의 그 사건처럼 말이다.

‘더 글로리’와 함께 호평을 받는 드라마 ‘모범택시2’, 두 드라마의 주제는 “사적 복수”다. 여기에는 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법에 의해 삶을 유린당했던 피해자들의 비극적인 현실이 있다. 돈과 권력으로 무장한 가해자의 폭력은 법을 만나 더욱 견고해지고, 피해자는 다시 한번 몰아치는 무자비한 폭력에 산산이 부서진다. “법대로 하라”는 말은 오히려 피해자를 절망으로 내모는 폭력적인 선언일 뿐이다.

무자비한 폭력에 내몰렸으면서도 법에 기댈 수 없는 드라마 주인공들은 “사적 복수”를 선택하고, 대중들은 주인공들을 응원하고 열광한다. (도영의 살인, 경란의 살인, 연진에게 더해진 살인 누명에 대해서는 더 캐묻지 않는다.)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는, 피해자의 삶을 온통 폐허로 만드는 현실에서 기댈 수 있는 건 겨우 상상과 드라마일 뿐이지만, 상상과 드라마는 다시 현실로 이식되어 현실을 움직인다. 학교폭력에 대중들이 이토록 강렬하게 반응하고 움직인 건, 이 드라마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더 글로리’ 파트2에는 명장면이 많지만, 두 장면이 인상적이다. 문동은이 복수를 멈추려고 했던 순간과 하도영이 박연진에게 사죄를 권했던 순간. 동은의 방문을 강제로 딴 박연진은 하이힐을 신고 들어가지만, 하도영은 구두를 벗고 방으로 들어간다. 카메라에 잡힌 가지런히 놓인 구두를 보고 문동은은 잠시 고민한다. 그건 “인간에 대한 예의”였으므로. 마음이 움직인 동은은 연진을 찾아가 잘못을 인정하고 자수하면 복수를 멈추겠다고 했지만, 연진은 남편 찬스로 어렵게 얻은 용서의 기회를 날려버린다. 박연진의 학폭 사실이 드러났을때, 남편 하도영은 동은에게 피해자의 주소를 부탁하고, 그 주소를 연진에게 주며 피해자 유족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말하지만, 연진은 그 주소를 구겨서 던져버린다.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에 대한 마라 맛, 사이다 맛 복수와 응징만을 바라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가해자들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깨닫고,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날이 오기를 더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피해자들의 수기를 읽으며 피해자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건 가해자들의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일이라는 데 놀랐다고 했다. 이건 복수의 득실을 따지는 하도영의 질문에 대한 주여정의 대답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피해자들이 잃어버린 것 중에 되찾을 수 있는 게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나의 영광과 명예, 오직 그것뿐이죠. 누군가는 그걸 용서로 되찾고, 누군가는 그걸 복수로 되찾죠. 그걸 찾아야만 비로소 원점이고.”용서의 기회를 거부당한 동은이 할 수 있던 것은 복수일 뿐이고, 그래서 복수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연진이가 모든 동은이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불가능하고 미련해 보이는 희망이지만, 끝내 버릴 수 없는 바람이다.

그래서, 기다릴게. 연진아.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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