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69와 60의 은폐된 노동시간 숫자놀이

기자 입력 2023. 3. 24.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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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인가. 1주 최대 69시간 노동 개편안 발표 뒤 주 60시간이 쟁점이다. 한 달 만에 무려 4차례의 정책 변경을 접하고 있다. 대통령은 “주당 60시간 이상 근무는 건강보호 차원에서 무리”라며 정책 재검토를 밝혔다. 소위 ‘주 69시간 노동체제’를 둘러싼 논쟁은 진보와 보수 혹은 노동계와 경영계만이 아닌 국민 모두의 관심사가 되었다.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확산된 한 누리꾼의 ‘1주일 69시간 기절 근무표’는 이를 방증한 사건이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사단법인 유니온센터 이사장

그렇다면 노동시간 개편 정책의 재검토 배경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3년 주 40시간 근무 체제인 5일제 시행은 우리들의 삶과 생활 전반을 바꾸었다. 일의 형태와 방식부터 개인의 가치관 등 삶의 의미 자체가 변화하고 있는 상황을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과연 1주 69시간 일하면 하루 몇 시간 일해야 하고, 휴식은 가능한지 묻는 것이다. 토요일까지 근무표를 짜 놓고 ‘나만의 휴가’라고 표기한 고용노동부의 가상근무표는 웃지 않을 수 없다.

주위 곳곳에서 ‘주 60시간 압축노동’으로 죽음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적지 않다. 택배와 우체국 배송, 물류센터와 마트 배송, 크레인 운전, 환경미화, IT개발, 병원 간호 업무까지. 2017년부터 2021년 7월까지 5년간 1205명의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연평균 500명이다. 2020년 한 해 업무상 뇌심혈관질환 질병의 과로사 승인만도 61건이나 된다. 2021년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노동기구(ILO)는 주 55시간 이상 노동은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은퇴 이후에도 조기 사망 원인으로까지 예측한다.

일은 삶의 즐거움을 얻는 수단이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주 60시간 이상 노동은 불안정 취약노동자들이 다수다. 파견용역, 고령, 여성, 작은사업장 노동자들이 두세 배 이상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노동시장에서 차별과 일의 배분에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다. 효율성의 논리에 숨겨진 불평등한 시간의 배분들뿐이다. 가장 밑바닥의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다. 다수는 일에 대한 선택권도 없다. 무엇보다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을 왜 감수해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더 많은 일을 통해 소득을 벌 수 있다는 적응선호 논리는 비판받아야 한다. 장시간 노동을 개인의 선호나 보상과 같은 ‘자유선택’ 논리는 환상에 불과하다.

일하다 죽는다는 뜻의 ‘과로사’는 일본과 한국에서만 사용된다.

번역할 단어가 마땅치 않아 한자어(過勞死) 발음 표기대로(Karoshi) 사용된다. 우리는 1953년 1일 8시간, 1주 48시간의 근로기준법 제정 이후 세 차례의 노동시간 단축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OECD 회원국 중 가장 긴 노동시간을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2010년 노사정은 OECD 평균 노동시간대 진입을 목표로 합의한 바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ILO의 22개 노동시간 협약과 권고 중 주 40시간(47호, 1935) 협약만 비준한 상태다. 그렇다면 오히려 주 4일제나 4.5일제(32~36시간)부터 주 48시간 상한과 야간노동 규제 그리고 법정연차휴가 확대와 포괄임금 폐지를 위한 ‘노동시간 법안’(Working Time Act)을 논의할 시기가 아닐까.

1968년 프랑스 국회는 노동시간 TF를 구성하여 일의 ‘필요 영역’과 ‘자유 영역’을 논의한 바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숫자놀이뿐이다. 주 52시간, 주 60시간, 주 64시간, 주 69시간 따위의 수치 이야기들뿐이다. “새벽 5시에 공장에 나가 밤 9시까지 일을 해요. 하루에 밥 먹을 시간 20분만 쉴 수 있습니다.” 산업혁명 초기 영국 아동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이 때문에 하루 최대 10시간 노동을 규정한 공장법 개정(1847년)이 추진된 것이다. 175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야만의 시대로 회귀할 수는 없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사단법인 유니온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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