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주69시간 일하면 애는 누가 키우나

김두현 변호사 입력 2023. 3. 2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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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서 일하고 쉬라? 노동자 삶 피폐해져
인간다운 노동과 삶, 우리사회 기준은 뭔가
김두현 변호사

어린아이가 탄광에서 석탄을 가득 실은 수레를 끄는 장면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무척 어색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아이는 노동을 하지 않아야 하니까. 시대와 상관없이 그랬던 건 아니다. 200년 전에는 아이도 노동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불법이다. 13세 미만 아동의 노동은 예술공연 등 특별한 경우 외에는 금지되고(근로기준법 제64조 제1항, 동법 시행령 제35조 제1항) 위반 시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근로기준법 제64조 제1항, 제110조).

노동법이 없는 세상은 어땠을까. 어린이가 일을 해도 강요된 것만 아니면 된다. 휴일도 없이 매일 새벽까지 일하고 졸음을 쫓아가며 높은 곳에서 안전장치 없이 근무해도 문제 되지 않는다. 노동자 본인이 더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동의한 것이니까. 그러다 떨어져 사지가 마비되면 더 이상 근로계약을 이행할 수 없으므로 해고된다. 본인이 졸다가 부주의로 다친 것이니 향후 생계비는커녕 치료비도 요구할 수 없다. 동료의 사정이 기가 막혀 다같이 작업을 중단하고 항의, 파업하면 그게 업무방해고 불법이다. 그 시절 영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OECD 1~2위라는 21세기 한국의 노동시간의 2배에 달했다.

지금은 어떤가. 아동에게 일을 시키는 건 아동과 부모가 모두 동의해도 불법이고 처벌받는다. 근로시간은 주 52시간으로 제한되고 사업주는 적정한 안전장치를 반드시 구비해야 한다. 일하다 다쳤다고 해고하거나 불이익을 줘서는 안되고, 설령 노동자 본인의 중대한 과실로 다쳤더라도 치료비와 생활비가 지급된다. 장애가 남으면 평생 장해급여도 받는다. 노동조합을 결성해 다같이 작업을 중단하며 사용자를 압박하는 파업은 합법이고, 사용자가 파업을 방해하면 그게 불법이다.

헌법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근로조건을 법률로 정하도록 하고 있다(헌법 제32조 제3항). 최저임금과 근로시간 제한, 휴일, 산업안전 등 노동법이 정한 기준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생각하는 인간다운 노동의 최저기준이다.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를 인간다운 노동조건으로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이처럼 법률은 대체로 그 시대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다. 아이는 노동이 아닌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윤리이고 합의다. 그러니 아무리 아이와 부모가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동의했더라도 안된다.

근래 정부는 연장근로를 특정 기간에 몰아서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 방침에 따르면 1주 최대 근로시간은 69시간까지 늘어난다. 바쁠 때 몰아서 일을 시키는 것은 경영계의 오랜 숙원이었다. 기업들은 두 팔 벌려 환영했다. 하지만 일하는 국민의 입장에서도 그런가. 아니다. 특정 기간에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쉰다지만 그 일정은 회사 사정에 따르는 것이다. 근로자는 사정에 따라 원하는 대로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쉴 수 없다.

회사 사정에 따라 어떤 주는 매일 밤까지 일하고 토요일까지 출근하는 삶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몇 주 뒤에 하루 이틀 휴가가 주어진다지만 ‘저녁이 있는 삶’은 사라진다. 정기적인 운동이나 배움, 취미생활이 당장 어그러진다.

아이가 있는 사람은 아예 답이 없다. 등하원 도우미나 아이 학원시간까지 회사 일정에 맞춰 늘렸다가 줄였다가 하는 게 가능할 리 없기 때문이다.

건강이 상하는 건 덤이다. 1일 11시간 이상 장시간 근무는 뇌경색이나 심근경색 등 과로성 질병의 발병위험을 2배 이상 증가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노동부고시도 주 52시간을 넘는 장시간 근로를 하다 발병한 뇌경색 등 과로성질병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더 문제는 정부 방침대로 노동시간 제한이 들쭉날쭉하게 되면 ‘평균 주 52시간’조차 잘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지금이야 시급 9620원이 안되면 최저임금 위반이고, 그 주에 52시간이 넘으면 불법인 걸 국민 누구나 명확히 알고 있다. 그런데 최저시급이 업종별로 천차만별로 달라지고 주 52시간이 1개월, 3개월, 6개월 단위로 달라질 수 있게 되면, 불법인지 아닌지를 수개월 뒤에 계산해봐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당장 몇 달 전 근무시간이 어땠는지 알기도 어렵고, 안다 해도 엑셀로 더하고 빼고 나누는 과정을 거쳐봐야만 한다. 법 위반인지 아닌지 헷갈리면 그 법은 지켜지지 않게 된다.


원래 모든 규제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자유를 부당하게 억압하려는 게 아니라 많은 국민과 사회적 약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노동법의 각종 규제는 사업경영의 자유를 제한하여 일하는 국민에게 인간다운 노동의 최저기준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 사회가 바라보는 인간다운 노동의 기준은 무엇인가. 주 69시간인가 주 52시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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