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 한국 사람이요? 일본 사람이요?

김진우 기자 2023. 3. 2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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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특파원으로 있던 2019년 6월30일의 일이다.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취재를 마치고 도쿄행 열차를 탔다. 일본 신문들을 훑어보다 우익 성향의 산케이신문 1면에 눈길이 딱 멈췄다. 일본 정부가 7월부터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동원(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로 경제 제재를 발동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한국 수출을 규제하고, 화이트리스트(수출 관리 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키로 했다는 것이다.

김진우 정치에디터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G20 의장국으로 “자유·공정·무차별적 무역”을 외친 일본이 그에 역행하는 조치를 내놓은 것이다.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미 2개월 전 대응 방침을 정하고 ‘한국이 가장 아파할 조치’를 찾았다고 한다. 이후 일본 정부는 한국 때리기와 의도적 냉대를 이어갔다. 확인도 되지 않은 전략물자의 북한 유출설을 흘렸다. 한·일 통상당국의 첫 실무회의는 도쿄 경제산업성의 창고 같은 회의실에서 열렸다. 고노 다로 외무상은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의 말을 중간에 끊고 “무례하다”고 면박을 줬다.

4년 전 일을 꺼낸 건 지난주 도쿄 한·일 정상회담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128년 역사의 경양식집에서 윤 대통령이 좋아하는 오므라이스에 맥주·소주를 곁들여 2차까지 한 것을 두고 “이례적 오모테나시(극진한 접대)”라는 평가가 나왔다. 그런데 이게 호들갑 떨 일인가. 세상에 공짜밥은 없다.

‘이례적 오모테나시’의 배경은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 말에 나온다. 정부안을 전하자 일본 측이 깜짝 놀라며 “학수고대하던 해법”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와 피고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뺀 안이니 일본으로선 ‘생큐’였던 셈이다.

‘이례적 오모테나시’의 맞은편엔 이례적 외교가 있다. 외교는 50을 주고 50을 받는 거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강제동원은 없었다는 일본 입장을 헤아린 일방적인 양보안을 내놓았다. 일본이 ‘나머지 반’을 채울 거라는 ‘물컵론’도 외교사에 남을 거다. 윤 대통령이 역설한 ‘그랜드바겐’(일괄타결)도 없었다.

이러니 일본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거다. 일본 언론은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에게 한·일 ‘위안부’ 합의, 독도 문제, 후쿠시마 수산물 문제 등을 거론했다고 보도했다. 대통령실이 뒤늦게 왜곡 보도에 유감을 표했지만 사후약방문이다. 일본의 ‘뒤통수 외교’는 수출규제 때 이미 경험하지 않았나. 대비하지 않았다면 무능한 것이다.

그래 놓고 방일 성과를 홍보하느라 해괴한 말들을 내놓는다. 대통령실은 “일본인 마음을 여는 데 성공했다”고 했다. 피해자가 가해자 마음을 열어야 하는 상황으로 뒤집어 놓고 성공이라 자랑하니 “어이가 없다”(유승민 전 의원). 여권에선 ‘식민지 콤플렉스’를 거론하고, 윤 대통령은 “당당하고 자신 있게 대하자”고 했다. 지금 일본을 ‘당당하고 자신 있게’ 대하지 않는 이들이 누구인가.

강제동원 문제는 피해자의 존엄성 회복의 문제이자, 국가의 역할을 묻는 문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보편 원칙을 뒤집고, 과거사 반성은커녕 한국 대법원 판결에 경제 제재로 앙갚음한 일본에 면죄부를 줬다. 피해자의 권리와 국민의 자존심을 짓밟고 얻겠다는 ‘국익’이란 뭔가. 최고 통수권자가 지켜야 할 선을 지키지 못했을 때 그 ‘국익’조차 제대로 지킬 수 있나. 되레 한국 사회의 역사 왜곡과 갈등을 부추기고, 안보·경제적 리스크를 키울 우려가 있지 않나.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일본에 당당하고 자신 있게 맞서온 국민들에게 역사관을 바꾸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반일을 외치며 정치적 이득을 취하는 세력이 있다고 갈라치기를 하고, 일본 야당과 비교하면서 한국 야당이 부끄럽다고 했다. 지금 누가 누구를 부끄러워해야 하나.

일본의 수출규제 발표 나흘 전인 2019년 6월27일.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는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의 도쿄 본사 앞에서 “73년이 지나도록 일본은 사죄 한마디 없는데 눈물로 보내온 이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라고 호소했다. 윤 대통령의 방일 전후로 양 할머니는 다시 물었다. “한국 사람이요 일본 사람이요?” “어느 나라 대통령이요?” 23분간 자신의 말만 일방적으로 했던 윤 대통령이 답할 차례다.

김진우 정치에디터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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