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미래] 혜자로움

기자 2023. 3. 2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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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자였던 2016년 말,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편의점 도시락에 대한 보도자료가 나왔다. 예상한 대로 편의점 도시락이 지나치게 짜고 고칼로리인 데다 영향 불균형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

비판적 기사를 쓰기 위해 먼저 편의점에 가서 도시락을 사서 먹었다. 나는 삼각김밥은 자주 먹었지만 편의점 도시락은 그때 처음 먹어봤다. 도시락은 내 입맛에 너무 짰다. 취재를 위해 식후 혈압을 쟀는데 고나트륨 탓에 혈압이 곧바로 120㎜Hg에서 150㎜Hg로 급상승했다.

그런데 그 당시 내가 빅데이터에 꽂혀 있었다. 구글트렌드를 비롯해 여러 빅데이터를 돌려보니 편의점 도시락에 대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연관어 자체가 부정보다는 긍정이 훨씬 높았다. 20~30대 청년층을 중심으로 새 제품이 나오면 도시락의 구성과 감상평을 SNS에 올리고 열심히 퍼나르고 있었다. 편의점 도시락이 주고객층인 20~30대에게는 ‘눈물 젖은’이 아니라 ‘재미있는’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정부와 사회가 ‘사회 안전망’을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정작 청년들의 육체적·정신적 허기를 달래주고 있던 것은 5000원쯤인 편의점 도시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혜자롭다’라는 형용사도 그때 알았다. 배우 김혜자씨를 모델로 한 편의점 도시락의 반찬 가짓수가 많아서 가성비가 좋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곧 도시락과 편의점을 넘어서 가성비가 뛰어난 상품에 붙는 형용사쯤으로 승격됐다.

그래서 나는 관점을 바꿔 기사를 썼다. 편의점 도시락이 짜고 영양이 부족하다는 뻔한 기사 대신 편의점 도시락이 왜 ‘혜자템’으로 불리는지를 분석했다. 그러나 기사가 나간 뒤, 난 편집국 내에서 비판을 들었을 뿐 아니라 독자 항의 전화도 많이 받았다. 왜 대기업이 운영하는 편의점 도시락을 칭찬하느냐는 거였다. 편의점 도시락에 대한 내 관점이 바뀐 과정을 그저 알려주기만 해도 받지 않았을 오해였다고 생각돼 아쉬웠다.

그런데 최근 ‘김혜자 도시락’이 다시 나왔다. 가격도 6년 전과 비슷했다. 점심값이 1만원이 넘는 ‘런치플레이션’의 현실에서 이 도시락의 재출시는 의미 있어 보인다. 언론도 칭찬 일색이다.

섬트렌드의 최근 1개월간 편의점 도시락 연관어 분석을 보면 가장 많은 연관어는 ‘혜자’였다. 이어 ‘맛있다’ ‘해결하다’ ‘괜찮다’ 등이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재미있다’ ‘즐겁다’ 같은 단어는 상위 연관어에 한두 개 정도밖에 없다. 편의점 도시락을 ‘재미’보다는 ‘끼니’라는 원래 의미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코로나19로 자산 양극화는 더 심해졌지만 청년층의 취업은 훨씬 어려워졌다. 지난해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청년 빈곤 실태와 자립안전망 체계 구축방안 연구’를 보면 19~34세 청년 10명 중 4명의 연간 소득은 2000만원 미만이었다. 평균소득도 2300만원이었다. 10명 중 3명은 빈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절망하고 있었다. 정부와 사회 공동체가 닦아주어야 할 청년의 눈물을 가성비 좋은 편의점 도시락이 대신 닦아주기에는 지금 청년들의 허기가 너무 커보인다.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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