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내가 이탈리아를 사랑하는 이유

경기일보 2023. 3. 2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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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나 박물관•유적지… 동서남북 볼거리 넘쳐
매장이 궁전•카페가 수도원 등 오래된 것들에 대한 존중
느긋하며 불편함 기꺼이 감수하는 삶의 방식 배어 있어
교회 건물을 활용한 텍스타일 박물관. 김남희 여행작가

 

역병이 창궐하기 전 해, 가을날의 며칠을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보낸 적이 있다. 안정환이 선수로 뛰던 축구팀이 있고, 피렌체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근처에는 아시시, 산지미냐노, 시에나 이런 이름난 곳들이 있었다. 페루자는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도시의 규모가 걸어 다닐 만큼 작고, 역사와 문화가 깃들어 있고,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페루자의 중심지는 11월4일 광장. 산로렌조 성당 계단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기 좋은 곳이었다. 13세기 조반니 피사노가 설계한 마지오레 분수, 산로렌조 대성당, 프리오리 궁전이 다 이곳에 서 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오래된 박물관 같았다. 헤이즐넛을 채운 다크초콜릿 바치(Baci)를 100년 전에 처음 만들어낸 초콜릿 회사가 이 도시에 있었다. 나는 매일 바치 초콜릿을 까먹으며 도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텍스타일 박물관에는 1801년 이탈리아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된 컴퓨터 형식의 직조 기계가 있었다. 디자인을 그린 필름을 넣으면 기계가 그걸 읽어내고, 사람이 손으로 직조를 하는 방식이다. 그 오리지널 기계를 사용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텍스타일 제품을 생산하는 공방이었다. 공방의 가장 오래된 기계는 1836년산. 이 공방의 모든 기계가 19세기 오리지널 제품으로 이탈리아에서 이런 방식으로 천을 짜는 곳은 이곳 하나만 남았다. 세 명의 직조 장인과 함께 이 공방을 이끄는 사람은 마르타. 한때 페루자에서 가장 유명했던 텍스타일 공방이 그녀의 고조할머니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대를 이어오던 공방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그녀의 어머니대인 1993년 문을 닫았다. 1994년, 마르타의 아버지가 경매에 나온 교회 건물을 구입했고 마르타는 다음 해인 1995년 그 교회에 공방을 다시 열었다. 공방은 아름다운 기물로 가득 차 있어 공간 자체가 품격 있는 전시장 같았다. “내가 철이 없고 어리석었지.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랐으니까. 12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의 테이블클로스를 하나 짜는 데 최소 22일에서 30일이 걸려. 근데 이탈리아에선 이런 제품의 세금이 68%야. 상상해 봐. 세금 내고, 장인들 월급 주고, 스튜디오 운영 비용을 마련하려면 테이블클로스 하나에 5천~6천유로(최소 600만원)를 받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거든. 그걸 누가 살 수 있겠어?” 그럼 도대체 어떻게 꾸려 가느냐는 내 질문에 그녀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다행히 내 남편이 치과의사야. 돈은 그가 벌어오고 난 이것만 운영하는 거지. 비즈니스와는 상관없이!” 내 짐작으로는 국가의 보조금이 있지 않을까 싶지만 어쨌든 별로 돈이 되지 않는 일을 긍지와 자부심만으로 운영한다니 대단할 수밖에. 부자들의 역할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스테인드글라스 박물관. 김남희 여행작가

다음 날에는 스테인드글라스 박물관을 찾아갔다. 1859년 화가이자 스테인드글라스 장인이었던 프란시스코 모레티에 의해 설립된 스테인드글라스 공방이었다. 설립자의 외가 쪽 5대손인 아나와 그 남편 조르지가 공방을 꾸려 가고 있었다. 공방은 15세기 건물이라 후기 고딕 양식의 인테리어가 남아 있었다. 전날 갔던 텍스타일 공방도 그렇고, 이곳도 이탈리아의 힘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힘들고 귀찮고 돈이 되지 않아도 묵묵히 가업을 잇고, 그 전통을 외부인과 공유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내가 이탈리아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이다. 이 나라는 어디를 가나 박물관이며 유적지였다. 이탈리아의 소도시에서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그저 내키는 대로 돌아다녀도 어디에나 볼거리가 넘쳤다. 어지간한 도시의 동서남북 어디로 걸어도 고층 건물 한 채 보이지 않는다. 명품 매장이 궁전이었고, 카페가 수도원이었고, 젤라토 가게는 귀족의 저택이었다. 오래된 것들에 대한 존중,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집착. 속도와 성장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 느긋함,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태도. 이런 삶의 방식이 어디에나 배어 있었다. 수백년 전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고단한 일일까. 촘촘한 규제의 그물에 갇혀 살겠구나, 내 집이어도 내 땅이어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구나, 이 도시의 주민들은 그런 부분에 대해 나름의 사회적 합의를 이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다녔다. 사람처럼 도시도 지나치게 아름다우면 고통을 겪는데 이탈리아는 도처에 그런 곳이 많았다. 인류 전체에 보물 같은 나라니 극성을 부리는 소매치기 같은 건 그냥 눈감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남희 여행작가

이탈리아에 살아본 사람들은 행정 처리의 비능률성, 사람들의 다혈질적인 성격 같은 걸 맹렬히 불평했지만 지나가는 여행자인 내게는 그저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깔끔하고 조용한 북유럽의 도시들에 비하면 좀 소란하고 슬쩍 지저분하기도 한 이탈리아가 사람 사는 곳 같아 더 정겨웠다.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는 왜 평생을 이탈리아에서 사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격정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거든요.” 그러면서 덧붙였다. 독일에서는 불법주차를 하면 이웃이 바로 신고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불법주차를 하면 이웃이 와서 몇 시에 경찰이 단속 나오는지 알려준다고. 오래전 이야기라 이제는 다르겠지만 작가의 이 말도 내 외사랑을 부추겼다.

오랫동안 찔끔찔끔 이 나라를 드나들기만 했던 내가 드디어 결심했다. 내년 한 해는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며 이탈리아에서 1년쯤 살아보겠다고. 노래처럼 들리는 이 나라 말을 더듬더듬 구사하며 이탈리아 곳곳을 여행 다니겠다고. 그 혼돈과 무질서와 비능률의 세계로 뛰어들겠다고. 돌이켜 보면 내 삶 자체가 계획, 능률, 효용 이런 단어들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저 마음 가는 곳에 몸을 두며 살아왔을 뿐. 다만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데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해짐을 깨닫는 중이다. 그러니 내 용기의 바구니가 텅 비기 전에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나라에서, 마음이 가는 도시에서 살아보는 일을. 학비와 생활비는 마련돼 있느냐고 묻는다면 먼 산을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완벽한 준비를 마친 후에 무언가를 시작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서울의 우리 집을 장기 렌트로 내놓고, 적금 담보 대출을 받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다. 길을 나서면 늘 새 길이 열리곤 했으니 이번에도 일단 시작해 보는 수밖에. 가지 않은 그 길을 미리 상상하는 것만으로 올 한 해는 설레며 지나갈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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