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모래시계’의 유산과 변화한 시대정신
지난 3월6일부터 방영 중인 KBS 월화드라마 <오아시스>(사진)는 오랜만에 등장한 선 굵은 정통시대극이다. 1970년대부터 격동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 서사, 굵직한 역사적 사건에 휘말리는 두 남성과 한 여성, 그들의 삼각 멜로 구도 등 여러 면에서 전설적인 시대극 <모래시계>(SBS)의 유산을 물려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동시에 여수라는 특정한 지역적 배경 설정, 영화계를 중심으로 한 대중문화사 반영, 10대 시절의 우정으로 먼저 시작된 세 남녀의 입체적 관계 등 <오아시스>만의 개성도 적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시간적 배경이 상당 부분 겹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모래시계>와 <오아시스>에서 시대정신의 변화가 느껴진다는 데 있다. 중심 배경인 군사독재정권 시기를 ‘야만과 폭력의 시대’로 인식하는 관점은 같지만, 주인공들의 운명을 가르는 핵심 갈등의 성격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시대극은 과거를 현재의 거울로 삼는 장르인 데다, 두 드라마의 방영 시기에는 30여년의 격차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모래시계>에서 주인공들의 행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념적 갈등이다. 주인공 태수(최민수)는 10대 시절 주먹질을 일삼던 반항아였으나, 어머니의 눈물에 마음을 고쳐먹고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꿈꾸게 된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으로는 바꿀 수 없었던 시대의 모순은 태수 부친의 좌익 이력을 문제 삼아 그의 꿈을 짓밟는다. 연좌제의 희생양이 된 태수는 그때부터 어둠의 세계에 가까워지고 만다.
두 번째 주인공 우석(박상원)은 가난한 부친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모범생의 길을 걷지만, 광주 민주화운동 진압군 경험의 충격과 죄책감으로 방황하게 된다. 훗날 고민을 끝낸 우석은 검사가 되어 ‘정의 실현’의 신념을 좇으며 살아간다. 태수와 우석의 친구이자 첫사랑이기도 한 또 다른 주인공 혜린(고현정)은 세 인물 가운데 제일 열정적으로 독재정권과 맞섰던 청춘이다. 군사정권의 모진 고문 끝에 변절자로 낙인찍히고 카지노 대부였던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게 된 뒤에도, 혜린은 업계와 정권의 유착을 고발하는 용기 있는 내부폭로자로서 젊은 날의 신념을 이어간다.
그런가 하면, <오아시스>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것은 계급 갈등이다. 1970년대 여수, 이웃으로 자란 주인공 두학(장동윤)과 철웅(추영우)은 각각 머슴의 아들과 주인집 도련님으로 설명된다. 철웅 집안의 소작농인 두학의 부친 중호(김명수)는 항상 두학에게 ‘도련님’ 철웅에게는 공부도, 싸움도, 그 무엇도 이겨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철웅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계급의 장벽에 번번이 부딪혀 좌절한 두학은 “삐뚤어진 세상에서는 삐뚤어지게 사는 게 맞는 거”라며 어둠의 사업에 투신한다.
한편 두학에게 마음의 빚을 진 철웅은 학생운동에 가담해 부끄러움을 씻어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번번이 두학을 멸시하는 계급의식을 숨기지 못한다. 철웅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권력에의 욕망이고, 드라마는 그 권력 뒤에 항상 돈이 오가는 장면을 보여주며 자본의 절대적 힘을 강조한다. 또 다른 주인공 정신(설인아)의 행보 또한 자본 축적 성공기와도 같다. 부친이 남기고 간 빚 위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정신은 영화 배급 사업에 뛰어들어 조금씩 자신의 지분을 넓혀간다.
요컨대 <모래시계>가 정치, 사회, 문화적 민주화가 진행되던 1990년대 중반의 시대정신을 담아낸 작품이라면, <오아시스>는 경제 논리가 모든 가치를 집어삼킨 지금 이 시대의 욕망을 투영한 이야기다. <모래시계>가 1987년 민주항쟁 시기 근처에서 모든 이야기의 대단원을 맞이한 것과 달리, <오아시스>의 대단원이 1998년 외환위기 시점을 예고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아시스>는 <모래시계>의 후예이면서, 동시에 지난해 방영된 시대극 <재벌집 막내아들>(SBS)의 형제처럼도 보인다. <재벌집 막내아들>이야말로 자본이 절대권력으로 군림하는 이 시대에, 그 변화의 기원을 추적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는 그 뒤를 이어 2023년의 시대정신이 어떠한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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