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삶의 슬픈 충전소였던 그곳…이젠 재개발의 폭력에 박제화된 우리들의 삶과 기억

기자 입력 2023. 3. 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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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피맛골
1971년, 2023년 피맛골.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광화문 교보문고 종로 쪽 출구를 나오면, ‘D타워’라는 건물이 떡 버티고 서 있다. 2023년 사진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다. 건물 아래쪽의 통로(‘SOHO’)를 따라 건물을 통과해 횡단보도를 건너면 ‘말과 소년’ 동상이 보인다. 동상 바로 뒤에 ‘르메이에르종로타운’이라는 초대형 건물이 있고 그 아래에도 통로가 보이는데, 통로 입구에는 조선 시대풍의 기둥에 현판이 걸려 있다. 지금은 빌딩 숲에 짓눌려 이름만 남아 있는 이 골목의 이름은 ‘피맛골(避馬골)’이다.

피맛골은 처음부터 평민들의 공간이었다. 조선 시대 종로는 궁궐과 관가가 가까워, 가마나 말을 탄 고관대작의 행차가 잦은 큰길이었다. 큰길을 가다 고관대작을 만나면 하급관리와 평민들은 엎드려 예의를 표해야 했으니, 이것이 싫었던 사람들은 뒤편의 좁은 골목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 골목에 ‘말을 피하는 골목’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연이다. 사람들이 다니니 주점과 국밥집 등이 생기고, 평민들의 활기로 떠들썩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선술집이, 1950년대에는 해장국집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낙짓집이, 그리고 빈대떡, 생선구이가 넘쳤다. 1970∼1980년대 고도 성장기에 이곳은 하루의 고된 노동이 끝나고, 술 한잔에 그날의 피로를 푸는 곳이었다. 힘들었던 그날의 일들은 술잔 속에 떨구고, 집에 가면 술기운에 바로 곯아떨어질 수 있게 해주는, 그래서 다음날 다시 일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삶의 슬픈 충전소’, 그곳이 바로 피맛골이었다.

군사독재 시절 최루탄과 경찰의 곤봉을 피해 시위대가 숨어들던 곳도 바로 이 피맛골이었다. 600년 동안 명맥을 이어왔던 피맛골의 숨통을 끊어버린 것은 ‘재개발’이란 이름의 폭력이었다. 2008년 서울시는 청진구역 정비계획안을 가결했고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피맛골 일대가 재개발되기 시작했다.

피맛골은 더 이상 없다. 1971년 사진 속의 ‘빈대떡 전문 경원집’은 경복궁역 4번 출구 뒤로 옮겼고, 당시의 피맛골 음식점들은 경희궁 앞의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품이 되어 있다. 낙서, 메뉴판, 심지어 외상장부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박제화된 피맛골을 보며, 우리는 모든 삶과 기억을 불도저처럼 밀어버리는 자본과 권력의 폭력에 전율한다. 골목을 통째로 옮겨버린 이곳에서, 우리는 이 도시의 기괴함을 느낀다.

*이 칼럼에 게재된 신문 사진은 셀수스협동조합 사이트(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김찬휘 녹색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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