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의 쓰고 달콤한 경제] 은행 위기와 대마불사 자본주의

기자 입력 2023. 3. 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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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위기는 자기실현적(self-fulfilling) 속성을 가진다. 은행의 실제적 상황과는 관계없이 예금자들이 은행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이면 그 자체로 은행은 파산한다. 은행의 기본적인 비즈니스는 예금을 받아 대출을 하는 일인데,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인출하면 버텨낼 수 있는 은행이 없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은행의 위기는 경제 시스템 전반의 위기로 비화되곤 한다. 은행은 돈의 흐름을 중개하는 경제의 혈관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은행이 힘들어지면 대출이 중단되고, 빌려준 자금을 회수하게 된다. 돈이 돌지 않는 금융시장의 경색은 실물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줘 급격한 경기 하강을 유발하게 되는데, 금융이 매개가 된 이런 일련의 악순환이 시스템 리스크이다. 혹여 은행이 파산하기라도 하면 혼란은 배가된다. 2007~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과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과정에서 경험했던 그 난리통이 시스템 리스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개별 은행의 위기가 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되는 것을 막는 것은 중앙은행과 관료들의 책무이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의 수장이었던 벤 버냉키는 2019년 <금융위기에 대처하기(Fire Fighting)>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버냉키의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개별 금융기관의 위기가 생기면 정책 당국자들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강력한 정책을 써서 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데, 2019년 당시에는 위기 때 쓸 수 있는 중앙은행의 정책 재량권이 너무 제한적이라는 것이 버냉키의 생각이었다. 버냉키는 1920년대 대공황을 깊이 연구한 경제학자이다. 자신이 중앙은행 수장으로 있던 2008년의 금융위기가 대공황 이후 가장 참혹한 경기후퇴(great recession)를 불러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근심이 이해되기도 한다.

인플레 억제보다 금융안정 선택

그렇지만 버냉키의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 버냉키의 책이 발간되고, 이듬해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국면에서 주요 중앙은행들과 정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더 파격적인 정책을 썼다. 양적완화를 넘어 특정 경제주체를 정부와 중앙은행이 사실상 지원하는 질적 완화 정책이 시행됐고, 현금의 직접 지원 등 파격적인 보조금 정책도 잇따랐다.

역병의 전 세계적 확산이라는 미증유의 위기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이기도 했지만, 실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어져 온 우리 시대 자본주의의 특징적 한 단면이기도 했다. ‘대마불사’ 혹은 ‘파산 없는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은 관료와 중앙은행에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부주의한 행동을 한 경제주체가 자신의 행위에 대가를 치르는 건 시장논리로 보면 합당한 일이었지만, 그 파장이 너무도 컸다. 대공황 이후 가장 큰 경기 침체였기 때문에 차라리 구제금융을 통해 리먼브러더스를 살리는 선택을 하는 게 옳았다는 판단을 했을 법하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AIG·시티그룹·BOA 등의 대마(大馬)들은 공적 지원을 받고 줄줄이 살아남았다. 앞서 언급한 버냉키의 책은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화들짝 놀란 정책 당국자들이 다른 대마를 살려내는 과정에 대한 생생한 기록에 다름 아니다.

금융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관료들의 매뉴얼은 확고하게 정립돼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공적 재원으로 민간 금융기관을 지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발이 클 수 있어, 외견상으로는 민간에서 자구책을 찾는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파산 위기에 몰렸던 크레디트스위스(CS)는 자국의 경쟁자 UBS에 인수됐고, JP모건 등 미국의 11개 대형 금융기관들은 파산 위험이 부각되고 있는 퍼스트리퍼블릭뱅크(FRB)에 무담보로 300억달러를 예치하기로 했다. 공멸을 막기 위한 동업자 의식의 발로일 수도 있지만, 100% 민간의 판단으로만 진행되는 과정은 아닌 것 같다. UBS는 크레디트스위스 인수 과정에서 돌출될 수 있는 부실에 대한 스위스 정부의 보증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은 바이든 행정부의 실세 경제 관료인 브레이너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과 회동을 가졌다.

연방준비제도도 BTFP(Bank Term Funding Program)라는 은행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민간은행은 유동성이 부족할 경우 기존에 보유한 우량 자산을 담보로 중앙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는데, BTFP는 은행이 보유한 담보를 시가가 아닌 액면가로 평가함으로써 쉽게 돈을 빌릴 수 있게 만든 제도이다.

위기는 막지만 장기 활력은 저하

대부분의 금융위기는 경제에 유동성을 충분히 공급함으로써 해결된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로 유동성 공급이 여의치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지만, 모르는 소리다. 작년 가을 영국에서도 금리가 상승해 주요 연기금들이 치명적 손실을 입을 위기에 내몰리자,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양적완화를 실시해 돈을 풀었다. 당시 영란은행은 금리를 공격적으로 올리고 있었고, 보유 중인 국채를 시장에 팔아 유동성을 줄이는 양적긴축 시행을 예고하고 있었지만, 금융 시스템이 흔들리자 과감히 돈을 풀었다. 흡사 과열을 막기 위해 에어컨을 켜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보일러를 가동해 온도를 올려놓는 꼴이었다. 향후에도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 억제보다는 금융 안정을 선택할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와 같은 시스템 리스크가 나타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다만, 이 과정에서 글로벌 경제는 구조조정의 지연과 인플레이션 압력의 지속이라는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다.

파산은 어떤 측면에서는 자본주의의 자정 과정이기도 하다. 리스크 관리에 실패한 플레이어에게 책임을 물어 시스템의 기강을 세우고, 비효율적인 경제주체들이 퇴출됨으로써 시스템의 효율은 개선된다. 2008년 이후의 주류 자본주의는 대마의 ‘파산’을 막음으로써 위기 발생은 막고 있지만, 장기적인 활력은 떨어지는 길을 걷고 있다. 또한 금융 안정을 위한 유동성 공급 조치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지속시킬 것이다. 금주 발표된 영국의 2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10.4%나 상승했다. 작년 가을 영란은행의 미니 양적완화가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강화시키는 데 영향을 준 결과일 수 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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