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금융 시스템, 믿을 수 있나요?

황지윤 기자 2023. 3. 24.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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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현지 시각)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앞에 길게 사람들이 줄을 선 모습. / UPI 연합뉴스

지난달 국내에 번역·출간된 에르난 디아스의 장편소설 ‘트러스트(Trust)’는 일본 영화의 걸작 라쇼몽(羅生門) 서사의 아류로 보면 별 볼일 없는 책인지도 모른다. 관점에 따라 진실이 달라질 수 있고, 진실에 다다르기 요원하다는 문제의식은 이제 진부하다. 하지만 우리를 지배하는 돈과 금융의 세계도 마찬가지. 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흥미진진하다.

소설은 20세기 초 미국을 배경으로 가상의 금융업자 앤드루 베벨과 그의 아내 밀드레드 베벨의 삶을 좇는다. 첫 번째 장은 벤저민 래스크와 그의 아내 헬렌 래스크의 삶을 그린, 소설 속 소설이다. 이름만 달리했지 사실상 베벨 부부 이야기다. 여기서 앤드루는 투자의 귀재로 그려진다. 그는 1893년, 1907년, 1929년 미국에 불어닥친 금융 위기 때마다 천문학적인 돈을 쓸어 담는다. 소설은 그에게 배후에서 시장 붕괴를 설계했다는 혐의를 씌운다. 그가 ‘보이지 않는 손 뒤의 손’이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장은 이 소설에 반박하기 위해 앤드루가 쓴 미완의 자서전이다. 세 번째 장은 자서전을 대필한 스물셋 여성 아이다 파르텐자의 이야기다. 아이다는 진실을 담기 위해 분투하지만, 앤드루는 “현실을 조정하고 구부리기 위해” 자서전을 쓰는 것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마지막 장은 아내 밀드레드의 일기다. 소설 속 소설에서 그는 정신병을 앓는 심약한 여성으로 묘사되고, 남편은 그를 자선사업에 몰두하는 부드러운 아내로만 한정 지으려 한다. 하지만 밀드레드는 남다른 감각으로 남편에게 투자 조언을 해줬다고 일기에 쓴다. 남편의 성공은 자신의 섬세한 손길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라고.

같은 듯 다른, 말의 향연이 펼쳐지면서 진실은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하지만 진실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게 있다. 오늘날 금융 자본은 실체 없이 ‘믿음’을 기초로 굴러간다. 하지만 믿음은 생각보다 유약하고 이를 둘러싼 시스템은 그리 미덥지 않다. 책에 언급된 세 번의 미 공황 때 은행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사람들이 맡긴 돈을 다시 빌려주는 은행의 특성상 신뢰가 깨지면 ‘인출 러시’로 촉발되는 파산은 피하기 쉽지 않다.

책장을 덮을 때쯤 미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가 터졌다. 18억달러 손실을 봤다는 공시를 내고 36시간 만에 초고속으로 파산했다. ‘스마트폰 뱅크런’이 벌어진 탓이다. 하루 만에 55조가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유동성이 부족해졌고 지급 불능 사태가 됐다. 뒤를 이어 스위스계 글로벌투자은행 크레디스위스(CS)가 위기를 겪고 헐값에 매각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CS가 발행한 채권 23조원어치는 휴지 조각이 됐다. 연이은 은행 위기에 ‘트러스트’의 속편을 보는 듯했다.

요즘 글로벌 금융 시장은 뒤숭숭하다. SVB와 CS 사태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라서다. 믿음이 깨지고 시장에 공포의 광풍이 불어닥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어느 때고 닥쳐올 수 있는 위기에 대비해 못미더운 시스템을 살피고 정비하는 일이다. 허망하다고? 그렇지 않다. 어쩌면 그게 기본이다. 영화 ‘라쇼몽’의 결말처럼 실체와 진실이 없어도 사람은 살고, 삶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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