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문명대 교수 “제2의 반구대 암각화, 뻘 속에 묻혀있을 가능성”

유석재 기자 2023. 3. 2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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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최초 발견자인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 손에 든 것은 반구대 암각화의 모형이다. /장련성 기자

시작은 울산 지역의 불교 유적 조사였습니다. ‘신라 초기에는 중국과 일본, 동남아로 내왕하는 외교 사절과 고승들이 모두 울산항을 통해 바다로 나갔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던 1970년 12월 24일, 갓 서른 살의 미술사학자 문명대는 동국대 박물관 울산지역 불적(佛跡)조사단의 조사책임자로서 울산 땅을 밟았습니다. 원효대사의 자취가 서렸다는 반고사 절터를 찾고자 했던 것이었죠.

그러다 “저 절벽에 이상한 그림들이 보이고 있는데 이끼가 끼고 흙탕물이 흘러내려 무엇인지 잘 모른단다”는 주민의 말을 듣고 ‘아, 마애불인가보다’ 하고 그곳에 다가갔다고 합니다. 마애불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글자와 그림, 기하학적 무늬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 만들어진 천전리 암각화(국보)의 발견이었습니다.

울산 울주군의 천전리 각석. 울산에 두 점 있는 국보 가운데 하나다. 청동기시대의 암각화와 신라시대의 다양한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막(序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더 엄청난 발견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1971년 3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친 조사 때마다 삼삼오오 조사 광경을 구경하던 대곡리 마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을 앞 냇가 쉼터 절벽에 가면 말이죠, 호랑이 그림이 있어요. 그것도 조사해야죠~!”

1971년 12월 25일, 아침 10시 문명대가 이끈 동국대 박물관 조사단은 하류 계곡에 있다는 그 ‘호랑이 그림’을 조사하러 나섰습니다. 참관을 위해 온 김정배·이융조 교수와 마을 사람까지 7~8명이 큰 배를 타고 떠났다고 합니다.

문명대는 최근 출간한 저서 ‘울산 반구대 암각화’(지식산업사)에서 그 발견의 순간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출발한 지 10분 만에 저 아래쪽에 보이는 절벽 일부가 멀리서도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암벽이 보여서 “저곳이 호랑이가 있는 곳 맞지요”라고 물으니 “물론입니다. 바로 저곳입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49쪽)

<배를 가까이 갖다 대어 보니 성기를 노출한 채 춤추는 사람과 바다거북이 3마리, 그리고 새끼를 등에 태운 고래 머리 부분만 물 밖으로 노출되고 있을 뿐 기대했던 호랑이는 볼 수 없었다.>(50쪽)

그 순간의 느낌은 이랬다고 합니다.

“아! 여기도 또 있구나.”

2월 17일 오후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에 위치한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에서 근접관람을 신청한 관광객들이 암각화를 바라보고 있다. 올해로 발견 50주년을 맞는 반구대 암각화는 문화재청으로부터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등재 추진 목록에 선정됐다. /뉴스1

이것이 한국 선사시대 문화의 정점(頂點)이라 평가되는 ‘반구대 암각화’(국보)의 발견이었습니다. 춤추는 사람과 바다거북이, 고래 머리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었습니다. 훗날 물이 빠진 뒤 드러난 반구대 암각화의 실체는 장엄했습니다.

너비9~10m, 높이 2.5~3m의 암반에 빼곡하게 새겨진 것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린 대규모의 기록화나 다름없었습니다. 바다를 뚫고 비상하는 듯한 수많은 고래들, 거북, 물개, 사슴, 호랑이, 멧돼지, 소, 토끼들. 몇몇 동물들은 내장까지도 자세히 묘사돼 있었습니다. 또한 그것들을 사냥하기 위한 배와 작살, 그물, 그리고 창을 든 사냥꾼과 춤추는 주술사…. 무려 307점(2013년 울산암각화박물관 조사 수치)의 그림이 바위 가득 장관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명대 교수의 저서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실린 반구대 암각화 전면 실측도.

반구대 암각화의 발견자인 문명대는 그 뒤 불교미술사의 대가(大家)가 됐습니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는 최근 반구대 암각화 발견 50주년을 기념한 저서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냈습니다. 손수 그린 실측도를 포함해 반구대 암각화의 모든 도상(圖像)을 수록한 결정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83세가 된 문 교수를 최근 서울 가회동 연구실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반세기도 더 지난 옛일을 어제처럼 생생히 기억해냈습니다.

서울 종로구 한국미술사연구소에서 반구대암각화 저서를 낸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가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장련성 기자

“그렇게 많은 그림들이 새겨져 있는데도 당시 마을 사람들은 고래나 사슴이 아니라 호랑이만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것 같았어요. 사람은 자기가 믿는 것만 보인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도대체 이 암각화는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요. 그는 “쪼는 기법과 양식으로 볼 때 신석기 전기인 기원전 8000~6500년까지도 올라갈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 시대 바다와 강, 육지에서 수렵과 어로를 펼치던 시대의 생활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문명대 교수의 저서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실린 반구대 암각화 실측도 일부.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말해주는 열쇠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큰 배를 타고 고래를 잡고, 창과 올가미로 들짐승을 사냥하며,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며 무당이 하체를 벗은 채로 춤을 추는 가운데 사람들이 축제를 벌이던 수천년 전의 삶이 문자가 아닌 그림으로 기록돼 있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많은 동물과 사람의 그림이 펼쳐진 암각화는 세계적으로도 오직 반구대 대곡리 암각화뿐입니다. 고래만 50마리 넘게 넘게 그려졌죠. 신석기시대 고래 집단의 종류, 행태, 습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0마리 이상 그려진 호랑이도 마찬가지고요. 사냥 기술과 의식, 사상, 사회경제상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문명대 교수의 저서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실린 반구대 암각화 실측도 일부.

문 교수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 주장을 했습니다. 요지는 ‘선사(先史)’시대의 유적이 아니라 역사시대에 포함되는 시대의 유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기적으로 우리 역사의 처음이라 할 수 있는 고조선(단군조선)과 연관이 될 수 있다는 얘기죠. 물론 당시 고조선의 영역이 지금의 울산까지 포함하고 있었느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근처에 있는 천전리 암각화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 생각되는데, 여기 새겨진 문양은 신라가 문자(한자)를 받아들이기 전 썼다는 그림문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아직 이런 주장들에 대해선 납득하기 쉽지 않고, 추후 연구가 더 진행돼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문명대 교수는 무척 인상적인 말 두 가지를 남겼습니다.

반구대 암각화의 인물상 중 가장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성기를 노출한 채 춤추는 무당의 그림입니다. 무릎을 굽히면서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드는 듯한 모습인데, 샤먼이 춤추면서 감정이 고조된 접신의 상태에서 주술을 행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구대 암각화 중 춤추는 인물상. 성기를 내놓은 채 팔을 위아래로 흔들며 춤을 추는 무당의 모습이다.

<필자는 반구대 암각화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단계에 있던 1979년 겨울방학 때 집청전(반구대 인근 가옥·기자 註) 방에서 원고 정리를 하다가 휴식하러 밖으로 나오니, 반구대 물가에서 여자 무당이 주문을 외우면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까이 가서 한동안 흥미진진하게 보게 되었다. 두 무릎을 굽혔다 폈다 두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춤추고 있는 무당의 모습이 반구대 대곡리 암각화 상단 춤추는 무당의 춤사위와 너무나 똑같아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주술 의례가 끝난 뒤 무당에게 ‘무슨 제를 지내느냐’고 했더니 ‘매년 이맘때에 지내는 용왕제를 지낸다’고 하기에 ‘이전 춤사위는 유래가 있는 것이냐’ 물으니 ‘예부터 내려온 춤사위’라는 것이다. 대곡리 암각화의 이 춤추는 인물상은 용왕 즉 수신(水神)에게 고래잡이의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사(샤먼)이고 우리식으로는 무당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울산 반구대 암각화’ 164쪽)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통해 이제 세계에도 널리 알려지게 된 한국의 무속신앙은 참으로 유구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1974년 2월 15일 반구대 대곡리 암각화 2차 조사 중 탁본 작업을 하고 있는 문명대(오른쪽) 교수.

다른 하나는 ‘제2의 반구대 암각화가 지금도 발견되지 않은 채 대곡천 다른 곳에 잠겨있을 수 있다’는 무척 흥미로운 얘깁니다.

<이때(1971년·기자 註) 또 한 가지 중요한 정보를 들었다. 역시 구경하러 온 아랫동네(사연리·범서리) 사람들 몇 사람이 사연댐 바로 옆 절벽에도 이런 그림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정보는 몇 사람의 전언이어서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만약 확인된다면 획기적인 성과가 될 것이었다.

필자는 구체적인 조사 계획도 세웠고 실제로 조사 시도도 했지만 현실적인 난관이 많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1974년도에 댐 상류에서 7~800m 정도 떨어진 지점의 물이 빠져 노출된 곳에서 신석기시대 석기들을 채집하는 성과는 올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유적은 그 후 아직 아무도 조사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울산 반구대 암각화’ 48쪽)

문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50년이 지나도록 그곳을 누구도 조사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물이 빠지지 않으면 조사할 수 없는 곳인데… 사연댐 근처는 물이 아예 뻘을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대한 조사는, 아마도 울산의 식수원이 다른 곳에서 마련됨으로써 더 이상 1965년 준공된 사연댐이 필요 없게 될 미래에야 이뤄지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연댐 때문에 1년에 두세 달은 물에 잠기는 국보 반구대 암각화는 지금도 계속 훼손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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