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같은 고객 마음… ‘리퀴드 소비’가 세계경제 휩쓴다

김지섭 기자 2023. 3. 2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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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Cover Story] 공유·구독경제·가치소비의 주역 ‘리퀴드 시대’

직장인 이모(32)씨는 한 달 서너 차례 자동차를 몰 일이 있지만 차를 구매할 생각은 없다. 쏘카, 그린카 등의 차량 공유 플랫폼에서 차를 시간 단위로 저렴하게 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소형 평수 아파트에 혼자 사는 이씨는 TV와 공기청정기도 2~3년 약정을 맺어 렌털(대여)로 쓴다. 스마트폰에는 쿠팡, G마켓 등의 오픈마켓을 비롯해 마켓컬리, 초록마을, 쿠캣 등 식료품 쇼핑 앱이 여러 개 깔려 있다. 이 중 특가 알림이 오거나 가격 인하 쿠폰이 오는 업체를 우선적으로 이용한다. 특정 앱의 ‘단골’이 아니라 혜택에 따라 구매처를 수시로 바꾼다. 옷도 특정 브랜드를 고집하지 않고 무신사처럼 여러 브랜드 제품을 모아 놓은 온라인 패션 플랫폼에서 가격과 최신 유행을 감안해 고른다. 이씨는 “큰돈을 들여 사 놓고 묵혀 두는 것은 낭비”라며 “브랜드보다 가성비와 실용성을 중시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씨의 생활 패턴은 최근 MZ세대를 중심으로 확산하는 유연한 소비 트렌드를 보여준다. 소유가 아닌 공유를 중시하고, 특정 제품이나 브랜드의 충성 고객이 되기를 거부하며, 가격이나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경영학계에서는 이러한 트렌드를 ‘리퀴드(liquid·액체) 소비’라 부른다. 구매 패턴이 정해져 있지 않아 소비자 행동을 종잡을 수 없다는 의미다. 쉽게 변하지 않으면서 고정적이고 정형화된 ‘솔리드(solid·고체) 소비’와 대비된다.

리퀴드 소비는 공유 및 구독 경제, 플랫폼 빅뱅, 가치 소비 등 최근 수년간 세계 경제를 휩쓴 주요 소비 트렌드의 탄생 배경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주목받는다. 국내외 기업들은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소비 트렌드를 실감하며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확산하는 리퀴드 소비

리퀴드 소비라는 용어는 영국 3대 경영대학원인 베이즈 경영대학원의 플로라 바디 교수와 킹스칼리지런던의 지아나 에커트 교수가 2017년 논문을 통해 처음 제시했다. 두 교수는 “물건을 소유하지 않으면서 상품과 서비스에 유연하게 접근하는 것이 리퀴드 소비의 핵심”이라며 “리퀴드 소비가 유연하고, 빠르고, 가벼운 라이프 스타일을 촉진시키고 있다”고 했다. 두 교수는 ‘유럽의 대표 지성’인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Bauman)의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 이론에서 영감을 얻었다. 바우만은 현대사회에 대해 “흐르는 액체처럼 시시각각 변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가) 매우 불안정하고, 가벼우며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

두 교수는 액체 고유의 특성과 바우만의 이론에 근거해 일시성(ephemerality), 접근성(access),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를 리퀴드 소비의 3대 키워드로 꼽는다. 일시성은 상품·서비스의 인기나 가치가 너무 빨리 식어버리는 세태를 의미하며, 접근성은 소유가 아닌 공유나 대여를 통해 상품·서비스를 편리하고 자유롭게 소비하는 행태를 가리킨다. 비물질화는 유형의 상품·서비스보다 소비 과정에서 무형의 경험을 중시하는 흐름을 뜻한다. 유행의 주기가 길고, 소유권에 기반한 물질적 소비를 지향하는 솔리드 소비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다.

과거 세대일수록 집이나 자동차 등을 소유하는 것에 집착하고, 평소 신뢰하는 브랜드를 잘 바꾸지 않으며, 온라인 결제나 구매보다 오프라인 방문을 선호하는 것은 솔리드 소비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두 교수는 “IT 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전통적 가치에 대한 도전, 개인의 자유와 환경 보호에 대한 인식이 확산된 것이 리퀴드 소비 트렌드를 불러온 배경”이라며 “리퀴드 소비의 세 가지 특성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모두 연결돼 있다”고 했다.

◇리퀴드 소비가 불러온 共有경제 시대

우버, 에어비앤비, 위워크와 같은 공유경제의 급성장은 리퀴드 소비의 확산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솔리드 소비가 지배하던 시대에 차량(우버)이나 사무실(위워크), 집(에어비앤비)은 당연히 소유하거나 독점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성장이 정체되고, 소득 증가세가 둔화하면서 소유와 독점은 비용만 많이 들고, 효율과 편의성이 크게 떨어지는 일이 돼 버렸다.

반면 공유의 범위는 의류, 가구, 가전 등으로 꾸준히 확장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2010년 35억달러(약 4조6000억원) 수준이던 전 세계 공유경제 시장 규모는 2021년 1560억달러(약 205조원)에 이르렀다. 10여 년 만에 45배가 불어난 것이다. 2027년에는 6000억달러(약 790조원)까지 덩치를 키울 것으로 보인다. 반면 MZ세대를 중심으로 소유에 대한 집착은 갈수록 줄고 있다. 35세 미만 미국인의 주택 보유 비율은 2005년 42.2%에서 2018년 36.4%로 감소했다. 자동차 보유를 부담스러워하는 청년층이 늘면서 18세 미국인 중 운전 면허를 딴 비율도 1983년 80.4%에서 2018년 61.2%로 크게 줄었고, 영국에서도 10대 운전 면허 취득 비율이 지난 20년간 41%에서 21%로 급감했다. 리서치 업체 유로모니터는 “주택과 자동차를 비롯해 가구·가전 등의 내구재에 대해서도 MZ세대는 소유 의지가 높지 않다”고 밝혔다.

솔리드 소비의 시대에 승승장구하던 완성차 업체나 건설사, 가전 업체 등은 체질 개선에 적극 나서고 있다. 현대차를 비롯해 메르세데스 벤츠, 볼보, GM 등 주요 완성차 업체들이 차량 공유 업체와의 제휴를 발표하고, 차량 구독 서비스를 앞다퉈 출시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현대차그룹의 제네시스(스펙트럼)·현대차(셀렉션)·기아(플렉스)는 2019년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다. 매달 50만~100만원을 내면 5~10여 종의 차종을 자유롭게 골라 탈 수 있다. 볼보(케어 바이 볼보)와 포르쉐(포르쉐 패스포트)도 북미와 유럽 등에서 유사한 구독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SK 등 건설사를 운영하는 대기업은 침실과 공부방을 겸한 개인 방을 빼고 주방과 화장실, 거실 등의 공간을 공유하는 코리빙(co-living·공유주거) 사업에 뛰어들었고, LG는 TV, 냉장고 등의 가전 렌털 사업을 벌이고 있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전미영 연구위원은 “소비자들이 소유보다 향유(享有)에서 더 큰 만족을 얻다 보니 기업들은 수익을 내기 위해 렌털과 공유 쪽으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패션 트렌드 수명, 3개월→3주로

문제는 공유나 구독 서비스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살아남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소비자 기호와 성향이 액체처럼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제품이나 브랜드 충성도가 약화되고, 유행 주기가 초단기화하고 있다는 점이 기업들의 골머리를 앓게 만든다. 스마트폰, 태블릿PC 등 모바일 IT 기기를 끼고 사는 현대인은 소셜미디어나 포털사이트를 통해 제품·서비스 관련 광고나 정보, 콘텐츠에 24시간 노출돼 있어 쉽게 마음을 바꿀 수 있다. 늘 같은 제품을 찾는 단골을 만들기가 그만큼 어렵다.

길이 1분 미만의 숏폼 영상과 영상 콘텐츠를 원하는 대로 빨리 감기나 건너뛰기로 보는 방식에 익숙해진 것도 소비자가 한 종류의 제품이나 브랜드를 진득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데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꼽힌다. 컨설팅 업체 액센추어에 따르면 미국 Z세대 소비자 중 “특정 브랜드에서 구매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답한 비율(36%)은 베이비붐 세대(60%)에 비해서 훨씬 낮다. 맥킨지 연구에 따르면 시장에 출시된 제품의 평균 수명도 지난 15년 사이 50%가량 줄었다. 2000년대 초반 3개월 정도였던 패션 트렌드의 평균 수명이 2019년 3주로 짧아진 것만 봐도 유행이 스치듯 지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트렌드 탓에 제품 라인을 증설했다가 낭패를 본 경우도 허다하다. 과거 해태제과와 팔도는 각각 허니버터칩과 꼬꼬면이 큰 인기를 얻으며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자 공격적으로 생산 라인을 늘렸으나 금세 인기가 시들면서 손해를 보기도 했다. 지난해 선풍적 인기를 끈 ‘포켓몬 빵’ 제조사인 SPC삼립이 생산량을 크게 늘리지 않은 것도 극도로 짧아진 유행 주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한 제과 업계 관계자는 “(증설에 주저한 이유로) 인기 요인인 스티커(띠부띠부씰)를 SPC가 충분히 납품받지 못한 측면도 있지만, 스티커의 양이 충분했어도 라인을 크게 늘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일시성이라는 리퀴드 소비의 특징을 역이용하는 기업도 있다. 농심은 인기 라면 제품인 ‘너구리’를 온라인에서 한 외국인이 글자를 뒤집어 ‘RtA’라고 읽은 것이 회자되자 즉시 ‘앵그리 RtA’라면을 한정 출시해 2주 만에 400만개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전 연구위원은 “매일 신제품과 프로모션이 쏟아지며 트렌드 주기가 날로 빨라지는 탓에 인기 제품도 수명이 3개월을 넘기기 힘들기 때문에 끊임없이 치고 빠지는 ‘숏케팅(short+marketing)’ 전략이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리퀴드 트렌드의 ‘비물질화’ 속성으로 인해 기업들은 제품·서비스 자체의 경쟁력 외에 구매 과정에서의 경험까지 신경 써야 하는 숙제도 떠안았다. 삼성전자가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1600평 규모의 거대 IT 기기 체험형 매장 ‘삼성837′을 열고, 일본 도요타의 프리미엄 브랜드 렉서스가 서울 롯데월드타워에 자동차와 함께 커피·디저트를 판매하는 카페 ‘커넥트 투’를 운영하는 것도 소비자 경험(CX)을 개선하고, 무형의 브랜드 스토리를 쌓아 올리기 위해서다. 비물질화는 물리적 재료의 감소나 제거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는 폐기물 발생과 과대 포장에 반감을 드러내는 친환경적 가치 소비와도 연관돼 있다.

◇갈대 같은 소비자 마음 얻으려면

리퀴드 소비에 대응하느라 애를 먹는 건 기업뿐이 아니다. 투자자와 증권사 애널리스트들도 시장 및 기업을 분석하는 작업이 갈수록 힘겨워지고 있다. 충성도 높은 브랜드나 제품군이 크게 감소한 반면 운 좋게 대박을 터뜨렸다가 유행을 따라잡지 못하고 금세 실적이 떨어지는 곳이 갈수록 늘면서 매출을 예측하거나 유망 기업을 선별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오린아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화장품 시장은 지난해 8% 정도 성장했는데, 리퀴드 소비 확산으로 유행 주기가 짧아지면서 브랜드 종류는 코로나 사태 이후 2년간 2배가 늘어 2만8000여 개에 이른다”며 “소비 시장의 예측 가능성이 줄고, 불확실성이 커지다 보니 앞으로 주가가 오를 종목을 추천해야 하는 애널리스트 입장에서는 난처한 점이 많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항시 위기 의식을 가져야만 리퀴드 소비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다고 조언한다. 현재 시장 점유율이 높더라도 유행이 순식간에 바뀌고,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쏟아지면서 소비자의 마음이 언제든 갈대처럼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 의류 및 용품 분야에서 압도적 지배력을 갖고 있는 나이키가 끝없이 혁신을 시도하는 것도 리퀴드 시대의 생존을 위해서다.

나이키가 미국 LA에서 운영하는 ‘나이키 라이브 스토어’는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꼽힌다. 이 매장은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에서 막대한 데이터를 가져와 매장 인근 소비자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해 진열한다. 판매율을 실시간으로 체크하면서 저조한 제품은 바로 교체한다. 또한 나이키 플러스 앱 회원은 사전 예약 시 매장의 스마트 라커에서 물건을 찾을 수 있다. 편의성과 구매 경험을 중시하는 리퀴드 트렌드를 발 빠르게 따라간 것이다.

일본 최대 온라인 패션 플랫폼인 조조타운은 맞춤 정장을 주문하는 고객에게 특수 의상(조조슈트)을 배송해주는 서비스를 내놨다. 1만5000개 내장 센서가 신체 사이즈를 정확히 측정한다. 신발 사이즈를 측정해주는 ‘조조매트’ 서비스도 있다. 인공지능(AI)과 기계 학습을 접목해 소비자 경험을 개인화하는 전략의 일환이다. 이런 전략에 힘입어 조조타운은 10~30대 고객 비율이 70%가 넘는다.

변화무쌍한 리퀴드 트렌드를 유연하게 따라가면서도 한편으론 기업이 구체적 비전(vision)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사업을 한다’(파타고니아), ‘지속 가능한 에너지로 세상을 변화시킨다’(테슬라)와 같은 기업의 변치 않는 사명에 소비자가 마음을 열기 때문이다. 기업 조직의 유연성을 높이고, 다양한 제품과 원자재를 빠르게 조달받을 수 있도록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인하대 이은희 소비자학과 교수는 “판매라는 것은 소비자를 향한 끝없는 설득의 과정”이라며 “ESG(환경·사회·지배구조)적 가치를 바탕에 깔고 소비자들의 변덕스러운 취향을 유연하면서도 공격적으로 공략하는 기업이 미래의 승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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