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치병에 은퇴, 어린이 야구코치…WBC우승 감독의 인생역전
21일(현지 시각)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결승에서 야구 종주국 미국을 꺾고 14년 만에 우승한 ‘사무라이 재팬(일본 야구 대표팀 애칭)’ 선수들은 구리야마 히데키(栗山英樹·62) 감독을 10차례나 헹가래 쳤다.
일본 언론에선 그를 오타니 쇼헤이의 ‘이도류(二刀流)’에 견줘 ‘구리야마류’라고 부른다. 이는 결승전에서 5회부터 매회 투수를 교체하는 초강수로 미국 강타선을 잠재운 그의 작전 스타일을 칭하는 말은 아니다. ‘구리야마류’는 ‘아빠와 공원에서 캐치볼을 하는 어린이’란 콘셉트를 중심에 놓고 팀 전체가 화합하는 새로운 일본식 야구 문화다.
구리야마 감독은 WBC 체코전을 앞두고 “전국을 돌면서 해설가로 활동한 2011년 당시 대지진이 덮친 참혹한 모습을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을 느꼈다”며 “지난주가 대지진 12주년이었다. 야구를 통해 슬픔을 없애고,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르빗슈 유(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요시다 마사타카(보스턴 레드삭스), 라스 눗바(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등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선수들이 WBC 무대에서 어린 시절처럼 유쾌하게 웃으며 야구를 했다. 그때 그 일을 안 했다면, 나 역시 감독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때 그 일’의 시작은 1999년이다. 1984년 일본 야쿠르트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구리야마는 1985년 평형감각을 잃는 난치병 메니에르병을 앓게 됐고, 1990년 29살의 이른 나이에 유니폼을 벗었다.
야구 인생에서 큰 좌절을 맛본 그는 홋카이도의 한 마을인 구리야마에 터를 잡았다. 도쿄 출신인 그가 그곳을 찾은 이유는 순전히 이름 때문이었다. 마을 청년회에서 그의 이름이 마을 이름인 ‘구리야마(밤나무의 산)’와 똑같다고 1999년 홍보대사를 의뢰한 것이다.
30대 후반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는 마을 주민들을 만난 자리에서 마음을 열고 본인의 꿈을 얘기했다.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꿈의 구장’과 같은 푸른 야구장을 만들고 싶다는 것. ‘꿈의 구장’은 주인공이 옥수수밭을 갈아엎어 야구장을 만들자 한때 메이저리거였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영혼이 되어 찾아온다는 스토리다.
주인공은 그 구장에서 아버지와 캐치볼을 하는데 구리야마도 야구의 원점은 아버지와 하던 캐치볼이라 생각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성원 속에 사비를 털어 황무지를 정비했다. 2002년 잔디가 깔린 야구장이 완성됐다. 그는 어린이들을 위해 야구 교실을 열었고 동네에서 야구 대회도 개최했다. 야구장 입구엔 항상 글러브와 공을 놓아두어 누구나 와서 캐치볼을 할 수 있게 했다.
구리야마 마을에서 꿈을 펼치고, 해설가로 야구와 인연을 이어간 그에게 2011년 프로야구팀 닛폰햄이 감독 자리를 제안했다. ‘야구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휘봉을 맡기고 싶다’는 이유였다.
2013년 오타니가 닛폰햄에 입단했다. 대부분 선수가 프로에 와서 투수와 타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현실에서 구리야마는 오타니의 꿈을 존중해 그가 이도류로 나설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았다. WBC 무대에서 스승과 다시 해후한 오타니는 옛 가르침대로 투수와 타자로 모두 맹활약하며 대회 MVP에 올랐다.
구리야마는 감독 부임 10년째인 2021년 9월, 닛폰햄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자 사퇴했다. 두 달 후 그는 ‘사무라이 재팬(일본 국가대표팀)’의 사령탑에 올랐다. 아사히신문은 “구리야마 감독이 대표팀에 있었기에 최고의 선수들이 하나의 팀으로 모일 수 있었다”고 전했다. 예컨대 일본어를 못 하는 일본계 미국인 메이저리거 눗바가 대표팀에서 활약한 것은 ‘야구를 사랑하는 어린이’의 마음이면 모든 걸 같이 한다는 구리야마류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다르빗슈는 우승 직후 “우리의 더그아웃에선 늘 웃음소리가 넘쳐났다”고 말했다. 오타니는 이번 WBC 대표팀에 대해 “최고의 팀으로 우승해 행복하다”며 “훌륭한 선후배와, 정말 좋은 팀원들과 야구를 할 수 있어 멋진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구리야마 감독은 이날 “오늘로 감독을 끝내고 내일부터는 아무런 직함이 없는 일반인으로 돌아간다”며 은퇴를 발표했다. 그는 “우리 아이들이 WBC에서 활약한 대표팀 선수들을 보고, ‘멋있다. 나도 야구해 볼래’라고 생각했다면, 정말 만족하고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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