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

경기일보 2023. 3. 2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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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총칼 무자비한 진압... 만세 함성, ‘비명’이 되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민중들의 함성이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던 1919년 3월 하순, 김포에서도 만세운동의 뜨거운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3월22일 월곶면과 검단면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3월29일까지 8일간 동안 양촌, 고촌, 하성 등지에서 약 15회에 걸쳐 이어졌다.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1만4천여명의 주민들 가운데서 120여명이 일제의 총검에 부상을 당했고, 200여명이 체포됐다. 미주지역에서 발행한 ‘신한민보’는 3월23일 김포 지역의 만세시위운동에 대해 ‘1만여명의 대관중’이라 표현하고 있다. 참여 인원으로 따지면 경기도내에서 두 번째이다. 그럼에도 김포지역의 만세운동은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김포시민들의 노력과 열망으로 2013년, 김포시 양촌읍 양곡2로 30번길 46에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1919년 3월 23일 양촌 오라니장터(현 양곡시장)에서 열린 만세운동을 재현한 모형. 윤원규기자

■ 독립만세의 불길, 33세 여성이 불을 지피다

김포에서 이처럼 대규모의 만세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무엇일까.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1914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는데, 이때 김포, 통진, 양천군을 김포군으로 통합하고 경찰서와 주재소를 집중 설치한다. 양동면에 일본인이 농림회사를 설립한 1914년 5월부터 김포지역에도 일본 자본과 일본인들의 진출이 본격화된다. 농토를 잠식한 일본인 지주들 아래에서 높은 소작료를 내야했던 조선인 소작농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1919년 3월22일 오후 2시, 군하리 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들 사이로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진다. 이날의 만세운동 중심에는 이살눔(1886~1948, 본명 이경덕) 애국지사가 있다. 33세의 나이로 이화학당에 다니던 늦깎이 학생 이살눔은 독립선언서 수십 장을 옷 속에 감춘 채 월곶면에 돌아와 마을의 유지인 성태영, 박용희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이살눔은 군하리 장터에 모인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통진향교와 면사무소, 주재소 등으로 돌아다니며 만세를 불렀다. 장터를 누비며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한 그녀의 뜨거운 외침은 김포 만세운동에 불을 지폈다. 이살눔은 ‘김포의 잔다르크, 김포의 유관순’이라 불린다.

김포시 양촌읍에 위치한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은 1919년 오라니장터 등 김포지역에서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선열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당시 사용했던 태극기와 3.1만세운동 관련 자료가 전시돼있다. 기념관 전경. 윤원규기자

3월 22일 군하리 장터 시위에 참여했던 최우석(1892~1942)은 28일 당인표의 집에서 동지들과 다음 계획을 논의한다. 3월29일 11시 무렵 읍내 향교에 4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자 최우석은 이들을 지휘하여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12시 무렵에는 월곶면 조강리와 갈산리 마을 주민 수백 명이 갈산리에 모여 태극기를 들고 임용우, 윤영규 등이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갈산리 만세운동을 주도한 명덕학교 교사 임용우(1884~1919)는 체포를 피해 학교가 있는 부천군 덕적면에 돌아가 다시 만세운동을 벌인다. 4월9일 덕적도 진리 바닷가에서 열린 명덕학교 운동회에서 학생과 학부형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이때 체포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왼쪽부터)①교육·독립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 운동을 펼친 김포시 독립운동가들이 전시되고 있다. ② 8·15 광복 당시의 다양한 모습이 전시되고 있는 광복의 탑. 윤원규기자

■ 1919년 3월23일 오라니장터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오라니장은 김포에서 가장 큰 장이었습니다. 일제의 임시토지조사국 조사에 따르면, 오라니장의 규모는 김포읍장과 군하리장을 합친 것의 두 배쯤이 되었다고 해요. 오라니장은 1770년에 펴낸 ‘동국문헌비고’에 장소와 개시일이 기록되어 있을 만큼 유명한 장입니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니 왜 이곳에 독립운동기념관이 세워졌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1919년 3월23일에 벌인 오라니장터에서의 만세운동은 두 조직에 의해 각각 전개되었다. 오후 2시에 벌인 만세운동은 박충서 박승각 박승만 안성환 등이 주도하였고, 오후 4시에 시작된 만세운동은 정인섭, 임철모 등이 주도한 것이다. 같은 날 2시간을 사이로 두 개의 조직이 만세운동을 벌였던 것은 물론 일제의 감시와 방해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박충서(1898~1934)는 어떤 청년이었을까? 양촌면 누산리 출신인 박충서의 신상을 기록한 감시카드에 부착된 흑백사진을 보며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수재들이 즐비한 경성제1고등보통학교(경기고)에 다녔으니 박충서는 집안과 이웃의 기대와 신망을 받았던 똑똑하고 반듯한 청년이었을 것이다. 만세운동의 현장에서 체포된 박충서는 경찰서에 끌려가 흠씬 두드려 맞으며 만세운동의 준비부터 진행과정을 빠짐없이 진술한 후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사진사 앞에 간신히 앉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박충서의 모습은 의젓하고 당당하다. ‘불령선인’을 철저히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해 상반신 정면과 측면을 촬영한 사진을 나란히 붙였다. 이름을 쓴 커다란 흰 천을 단 상의는 모진 고문을 당해 살이 터지고 시퍼렇게 멍이 든 몸을 가려주었을 것이다.

박충서는 자신이 작성한 격문 수십 통을 외가 친척인 오인환, 정억만 등을 통해 양촌면 주민들에게 배포하도록 한다. 3월23일 오후 2시, 박충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오라리장터에서 태극기를 펼쳐들고 군중을 향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주도한다. 얼마 후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현장에서 박충서를 비롯한 6명을 시위주동자로 체포한다. 박충서는 징역 2년, 박승각 박승만 정억만은 징역 1년, 안성환 전태순 오인환은 징역 8월을 선고받는다.

한편, 오후 4시의 만세운동은 정인섭 임철모 등이 주도한다. 23일 전날에 만들었던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장터로 향한 정인섭(1986~1944)은 군중들이 모인 장터에서 태극기를 펼쳐들고 시위대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했고, 임철모(1883~1919)는 태극기를 휘두르며 시위대를 이끌었다. 군중을 이끌고 감시와 탄압, 수탈의 말단 기관인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향하던 이들은 연락을 받고 출동한 용산 헌병대에게 태극기를 빼앗기고 체포된다. 정인섭은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았고, 임철모는 징역 8월을 선고 받고 옥중에서도 수인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모진 고문을 받고 5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3월 24일부터 25일까지 이어진 고촌면의 만세운동은 산곡리 출신의 김정의(1899~1963)가 주도한다. 중동학교 학생 김정의는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를 피해 고향에 돌아와 김정국, 윤재영, 이흥돌 등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며 만세운동을 결의한다. 3월 24일 인근 주민들과 신곡리 뒷산에 모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눠주고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다음날에도 김남산, 이흥돌 등과 함께 태극기를 장대에 높이 달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왼쪽부터)①전국의 3·1운동부터 김포의 3·1운동까지 독립운동의 전개과정이 전시되고 있는 독립의 함성 전시관. ②일제강점기에 발행된 태극기가 그려진 엽서들. 윤원규기자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3·1독립정신’

김포를 빛낸 독립운동가들의 얼굴과 행적을 새긴 동판이 이어진다. 그들 중에서 안경을 낀 여성 한 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로 김포에 만세운동의 불길을 지핀 독립운동가 이살눔 선생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한다. 세상을 떠난 지 44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오라니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임철모 선생은 체포된 그해 옥중에서 순국하지만, 72년이 지난 1991년에야 애국장에 서훈된다. 동판에 새겨진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생전에 제대로 보상과 대접을 받지 못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공적이 명백하게 확인되지만 일제가 남긴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포상에서 빠진 분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은 양촌청소년문화의집(김포시청소년육성재단 대표이사 심상연)과 한 공간에 둥지를 틀어 지역 청소년들이 자연스럽게 김포시의 빛나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배우고 있다. 현재 기념관에서는 ‘신문이 그려낸 김포’라는 주제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특별전을 기획한 김민주 학예연구사의 안내를 받아 누렇게 변색된 오래된 신문 속에서 김포의 숨겨진 역사를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나라 안팎이 소란하고 어지러운 삼월이다. 104년 전 겨레를 하나로 뭉치게 했던 3·1정신의 숭고한 뜻을 되새겨야 할 때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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