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경계·관습 벗어나… 캔버스 위 해방을 외치다

김신성 2023. 3. 2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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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 8人 ‘컬러풀 한국회화展’
강하진·권순철·이강소 등 원로작가들
독창적 작업 세계로 현대 회화史 초석
최상철, 의지 덜어낸 ‘그리지 않은 그림’
오수환, 無心서 나오는 굵고 힘찬 선 등
8色 미학적 지향 담은 23점 한자리에
서울 아트스페이스3서 내달 15일까지
좁고 긴 띠 모양의 합판 조각으로 캔버스 가장자리를 둘러싼 후, 물감을 묻힌 돌멩이를 캔버스 속에 가두고 그 틀을 이리저리 기울여 그림이 그려지게 한다. 틀을 기울이는 행위는 작가의 의지에 의한 것이지만, 돌이 굴러다니면서 그림을 그려내는 것은 전적으로 우연과 상황의 몫이다.
최상철, ‘Drawing 080802’(48x65㎝), 2008년작. 물감을 묻힌 돌을 굴려 만든 작품이다. 아트스페이스3 제공
우연(돌이 굴러갈 방향을 정확히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 그림을 그리고, 상황(돌에 묻은 물감이 더는 묻어나지 않을 때)이 그림을 완성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림(흔적)은 주어진 사각형 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림의 틀이 그림의 내용을 규정한다. 물감 묻은 돌멩이는 결코 사각형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그림을 형성한다. 이것이 이 그림의 조건이다.

이는 최상철 작가의 작업 방식이다. 지극히 우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선을 도출해내려는 노력이다. ‘그리지 않고 그려지기’를 바라는 시도다. 마음을 비워서 욕심의 작용을 최대한 줄이자는 의도다. 그는 줄곧 이러한 시도를 이어왔다. 그는 형식(길들여진 자기, 모든 방법을 이미 알고 있는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는 원심적 사유와 그럼에도 어김없이 형식(자기)으로 되돌려지는 구심적 사유가 되풀이되는 과정을 통해 삶과 예술의 속성을 본다.

작가가 의식으로 배워온, 그리고 몸으로 체득해온 모든 조형적이고 형식적인 자신을 버리고, 아예 형식이 무의미해지는 지점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관습적인 것들을 지우고자 하는 이러한 제스처는 충실한 모더니즘적 사유이자 아방가르드 논리에 밀착된 엄격한 태도다. 작가 자신이 의도적 표현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을 피하고, 비의도성·비주관성·타자성을 적극 끌어들여, 결과물이 가장 자연스러운 그 무엇이 되게 한다. 이러한 철저함이 최상철 작업의 미덕이다. 그의 그림은 결국 그리지 않는 회화의 형태라는 아이러니한 그림이 된다.

해방둥이 작가들의 그림을 모은 전시 ‘컬러풀 한국 회화 - 조화(調和)에서 정화(淨化)까지’에 가면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한국 현대 회화사의 초석을 닦은 주인공들로 구성했다. 강하진, 권순철, 박재호, 오수환, 이강소, 이봉열, 최상철,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하동철 작가의 8인 8색 작품 23점을 소개한다. 서울대 미대 심상용 교수(서울대미술관 관장)가 기획했다. 1950년대 이후 불안정했던 사회 속에서 우리의 작가들이 독립적으로 발전시켜온 고유의 미학에 주목한다.

강하진은 자연에 내재한 울림 현상을 포착하려 한다. 자연과의 교감을 시도하며 그에 동화하고자 한다. 그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캔버스의 가장자리를 목탄으로 계속 두드림으로써 목탄 가루가 캔버스 표면에 흩어져 비정형의 흔적을 남기도록 유도한다. 본인이 직접 그린다는 능동적 행위보다는 그림이 그려지게끔 이끄는 작가 자신의 수동적 행위를 중시한다.
오수환, ‘대화(Dialogue)’(162.2x130.4㎝), 2022년작.
오수환의 선은 힘이 있으되, 그 힘은 대상에 얽매임이 없는 자유로운 운행에서 오는 힘이다. 태도는 분명하지만 예측하긴 어렵다. 선언적이지 않고 포용적이다. 욕망이 비워진 행위다. 비운다는 것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진리를 꿰뚫고 지나가는 그 무엇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는 것. 무심의 미학이다. 마음을 비워야 영혼이 잔잔해지고, 의식의 안개가 걷힌다. 그가 긋는 선은 이렇듯 그 힘을 비움으로써 힘 있는 것이 된다.

하동철은 물감에 적신 실을 캔버스 위에 고른 간격으로 튕겨 가득 채운다. 선의 굵기와 간격의 변주를 활용해 화면에 ‘빛’의 이미지를 정착시킨다. 캔버스 천의 격자구조를 떠올리게 하는 바탕의 줄과 그 위를 가로질러 가는, 튕겨서 이룬 사선의 줄들이 얽혀 만든 촘촘한 그물 같은 시각적 효과, 그리고 주변으로 튕겨 나간 반점과 얼룩들은 인위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의 대비 속에서 빛을 발한다.

프랑스의 이론가 필립 다강은 이강소의 회화에 대해 ‘색채적 금욕주의’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이강소가 왜 그토록 엄격하게 흰색, 회색, 엷은 청색으로만 스스로를 국한하는가 의아해 묻고서는 아마도 서구의 모노크롬과 조선의 문인화, 백자 등의 색감에서 미적 자양분을 취한 결과일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오늘의 이강소는 ‘색’의 경계를 편안하게 넘나든다. 이제 그의 오리와 보트는 엄숙하고 감정 표현이 배제된 잿빛 파도 위에서 넘실거리지 않아도 된다.

권순철의 회화를 두고 추상이니 구상이니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윤곽선만 아니라면 그의 회화에서 몸과 산과 대지의 표현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신체와 넋의 표현도 동일한 결, 동일한 마티에르(재질감)를 갖는다. 그의 캔버스는 어떤 절박함으로 인해 절충적인 것들을 수용할 겨를이 없다. 그가 몸을 그리면 땅이 되고 땅을 그리면 몸이 된다. 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변함이 없었지만, 그의 회화만큼 시대적인 것도 없다.
박재호, ‘자생공간 99 - 31’(117x117㎝), 1999년작.
박재호는 회색을 쓰더라도 무겁지 않게 느껴진다. 그의 추상성은 감정선을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리듬을 적절하게 탄다.

이봉열의 그림에 있는 목화 봉오리는 실향의 그리움을 나타낸다.

4월15일까지 서울 종로구 효자로 아트스페이스3에서 관람할 수 있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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