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조여오는 미국의 반도체 압박…“이제 시작이야”

김양순 2023. 3. 23. 19:5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사진 가운데 국내에서 가장 많이 본 사진은 단연 이겁니다.

반도체 웨이퍼를 들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

사실 웨이퍼도 들었고, 웨이퍼를 잘게 쪼갠 칩도 들었습니다. 그만큼 바이든이 반도체 이야기를 많이 했고, 미국 대통령이 얘기를 많이 한다는 건 그런 이유가 있는 겁니다. 2021년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삼성전자, 인텔, 엔비디아 등 반도체 업체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처음에는 공급망 문제 때문이었지만, 미국의 마음이 단순히 공급망을 원활히 하는 목적 만은 아니었다는 게 곧 드러났습니다. 2022년 미국은 초당적으로 작업했다며 '반도체 지원법'을 미 의회에서 통과시킵니다. 미국에 투자하는 반도체 기업들에게 최대 520억, 우리 돈으로 68조 원을 주겠다, 대신 중국에 투자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가드레일(안전장치)을 포함해서요. 여기까지만 해도 좋았습니다.

막상 돈을 주려고 하니 '퍼주기' 논란이 걱정됐나 봅니다. 미 상무부는지난 주 이런 조건을 걸었습니다.

보조금을 신청하려는 기업은
▲소수자(Minority- 인종적 개념)가 소유하거나, 여성, 제대 군인이 소유한 기업을 위해 기회를 창출해야 한다
▲기후 변화와 환경에 대한 책임을 입증해야 한다
▲경제적 포용성을 갖고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투자를 해야 한다
▲생산에 있어 미국에서 생산된 철, 철강,건설 자재를 사용해야 한다


■슬금슬금 추가되는 조건... 모든 노동자의 보육을 책임지라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를까봐 구체적으로 예시와 설명도 달았습니다.

미 상무부는 반도체 지원금을 신청하려는 기업들은 생산 지역에 노동자들을 위해 저렴한 주택을 지어줘야 하고초중고등학교는 물론 지역 커뮤니티 칼리지에 대한 투자를 약속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모든 직원에게 보육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요건입니다.

노동력에 관해서는 훨씬 더 엄격합니다. 보조금을 받으려는 기업은 기본적으로 "경제적으로 취약한 개인"을 포함해 노동조합에 가입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고용해야 합니다. 지역 대학, 취업 센터 같은 교육 기관부터 에 이르기까지 인력 알선 센터 같은 다양한 구인 업체들과 협력하고 "부문별 파트너십"(어떤 파트너십인지는 모르지만 그 지역에서 노동력을 찾으라는 의도는 분명합니다) 을 구축해야 합니다. 또한 교통 또는 주거 지원을 포함해 해당 지역사회에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취약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포괄적인 서비스'를 어떻게 제공하겠다, 라고 보조금 지원서에 자세히 설명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정도면 역 정부가 세금을 해야 할 일을, 연방 지원금을 받는 너희가 대신 다 해줘 라고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에다 주식 환매와 배당금에 대한 제한도 있습니다. 미국의 보조금으로 주식이나 배당금 같은 자본 소득을 창출하지 말라는 겁니다.

급기야 반도체 보조금을 받으려면 군과 정부에 반도체 생산 시설을 공개해야 한다는 조건도 걸었습니다. 안보와 관련된 사안이니까 봐야 한다는 겁니다.

이쯤 되자 미국에서도 헛웃음이 나오나 봅니다.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이 우리나라보다도 제도화되어 있지 않은데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려면 엄청난 돈이 드는 만큼 커다란 생산 시설이 들어오는 곳에 보육시설이 생기는 것은 누구나 환영한다, 하지만 그걸 왜 기업이 정해서 운영해야하는데? 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습니다.

오바마 정부에서 자동차 산업에 대한 대통령 직속 태스크포스를 맡았던 스티브 래트너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관료주의는 벗어던져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막대한 연방 세금을 사용하니 납세자들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중국의 턱 밑에 있는 반도체 산업을 미국으로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가져오는 것이 최종 목표"라면 이것저것 덮어씌운 조건들이랑 걷어내고 제대로 목표에 집중하라고 백악관에 조언합니다.

■연방 지원금을 받을 경우 까다로운 미 환경정책법 적용...평균 4년 반 걸려

그런데 여기에 폭탄 하나가 더 남아있습니다. 아직까지 공론화되지 않은 사안이죠. 연방 지원을 받아 건설되는 프로젝트는 국가 환경 정책법에 따르게 돼 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반도체 공장 관련 환경, 건강 이슈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데 미국이라고 다를 바 없습니다. 환경법에 따른 단계별 인증을 받기가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연방 자금이 들어간 건설 프로젝트를 살펴보면 평균 4년 반 동안 검토가 이뤄졌다고 합니다. 평균 4년 반이면 이미 정부가 바뀌는데, 과연 환경 인증이 가능하긴 한 걸까요? 연방 환경청 뿐이 아닙니다. 해당 공장이 들어서는 시(삼성전자의 경우엔 테일러시). 주 별, 연방 별, 각 차원의 수많은 허가와 승인이 필요한 상황에서 기업들이 연방 보조금을 받는 게 과연 유리할 것인지 계산기를 두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수출통제는 10월에 다시 얘기해보자

10년 동안 중국에 신규 투자를 금지한다더니, 갑자기 중국에 첨단 장비를 들여가지 못하도록 수출통제를 걸었습니다. 중국 공장에서 기술 업그레이드를 못하게 하고, 새로운 생산 설비를 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니 수출통제의 명분은 십분 이해합니다. 그러나 미국에 반도체 공장은 아직 짓지도 않았고, 중국 반도체 공장은 한참 전 부터 가동되던 건데, 기업 입장에선 갑작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업계의 이런 우려들을 반영해 미 상무부는 지난해 10월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에 대해 1년 동안 수출통제 유예를 내렸지만, 중국에 반입이 가능한 것들은 이미 범용(구형) 반도체 장비들 뿐입니다.

SK 하이닉스가 2021년 우시 공장에 들여가려던 첨단 노광장비(EUV)는 반입이 지금까지도 못들어갔고,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가드레일과 별도로 수출통제 유예 문제는 10월 4일 만료 전에 다시 논의해봐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수출 통제 유예를 다시 받는다 하더라도 어차피 미국이 생각할 때 첨단 반도체 장비의 중국 반입은 절대 불가로 해석됩니다.

■조금씩 조금씩 조여오는 미국... 이제 시작이야

미국에 투자하는 반도체 기업들에게 최대 520억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미국의 반도체법안에 국내 언론들은 반색했습니다. 중국에 대한 가드레일 조항이 살짝 우려는 됐지만, "최대 수혜자는 삼성전자", "프렌드 쇼어링" 표현을 쓰며 '역시 우리 편이야' 라는 보도가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1년 가까이 지난 지금, 미국은 조금씩 조금씩 목줄을 조여오고 있습니다.

기술 업그레이드를 해도 좋으니 생산량만 5% 혹은 10%를 넘지 말아라, 라고 가드레일을 발표했지만, 수출 통제는 가드레일과 또 무관한 사안입니다. 미국 보조금을 받으려고 했더니 돈은 주지도 않고 1년 째 날아오는 고지서만 쌓여가는 느낌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외길입니다. 뒤로는 갈 수가 없게 됐습니다. 계속해서 죄어들어오는 고삐라면 지금이라도 현명하게 매듭을 지어놔야할 땝니다. 자칫 코뚜레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반도체 업계를 휘감고 있습니다.
https://news.kbs.co.kr/special/danuri/2022/intro.html

김양순 기자 (ysooni@kbs.co.kr)

Copyright © KB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