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선의 풀무질] 디지털 원주민을 위한 정치

한겨레 2023. 3. 23. 18:5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범선의 풀무질]한국인은 가장 연결돼 있지만 가장 단절돼 있기도 하다.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모여 살지만 1인 가구 비율이 40%를 넘는다. 우울증 유병률은 오이시디 국가 중 1위로 10명 중 4명이 앓고 있다. 기계와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사람과 관계는 멀어진다. 역사상 가장 많은 친구를 가졌지만 가장 외로운 세대. 기대 수명은 어느 때보다 높지만 정신은 피폐한 세대. 디지털 세대는 완전히 새로운 정치를 요구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비상경제민생회의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전범선의 풀무질] 전범선 |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0.78. 출산율이 더 떨어졌다. 서울은 0.59다. 세계에서 가장 아기 낳기 싫은 나라다. 출산율 걱정한다는 북유럽도 1.5 수준이다. 외신은 한국의 유교적 가부장제를 탓한다. 일리가 있지만 같은 문화권의 일본, 중국도 1.2 이상이다. 0.78이라는 숫자는 예외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절반 이하다. 예외적 현상은 예외적 설명이 필요하다.

26. 자살률은 더 올라갔다. 인구 10만명당 26명이 극단적 선택을 한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힘든 나라다. 오이시디 평균의 두배 이상이다. 출산율 꼴찌인 나라가 자살률 1위인 것은 당연하다. 동전의 양면이다. 살기 힘드니 낳기도 싫다. “엠제트”(MZ)라고 불리는 우리에게 둘은 같은 문제다. 미래가 안 보인다.

생명의 본질은 지속과 재생산이다. 살고 싶고 낳고 싶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 위협받고 있다. 그야말로 생명의 위기다. 무엇 때문에 미래가 불안한가? 나는 기후·생태위기와 디지털 혁명에 주목한다. 환경이 안 좋아지면 생명의 지속가능성과 재생산이 줄어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다. 나는 기후·생태위기 해결을 위해 인구가 대폭 감소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출산율 저하가 반드시 나쁘다고는 보지 않는다. 다만 그 이유가 살인적인 사회구조라는 것이 문제다. 나 하나 살기도 힘들어서 애를 안 낳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창문만 열어도 우울하다. 미세먼지 때문에 온 세상이 불투명하다. 하지만 기후·생태위기는 전지구적 문제다. 대한민국보다도 환경이 안 좋은 나라가 많다. 미세먼지만 해도 인도, 중국이 더 심각하다. 산업화로 인한 공해는 물론 생명을 크게 해치지만, 현재 대한민국을 구분 짓는 핵심 변수는 아니다. 출산율 꼴찌와 자살률 1위라는 예외적인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핵심 변수는 디지털 혁명이다. 세계 기술 변화는 미국 실리콘밸리가 이끌고 있다. 그러나 기술 변화로 인한 사회 변화는 한국이 먼저 경험한다. 페이스북 이전에 싸이월드가 있었으며, ‘레딧’과 포챈‘4chan’ 이전에 디시인사이드와 일베가 있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연결된 나라다. 인터넷 이용률과 데이터 사용량이 독보적 1위다. 디지털 혁명이 가져오는 혜택과 병폐를 가장 앞서서 느끼고 있다. 한류의 성공도 그 덕이요, 사이버 범죄도 그 탓이다.

18세기 산업혁명을 기억한다. 기술 변화는 대서양 동쪽, 영국에서 나왔지만 그에 따른 사회 변화는 대서양 서쪽, 미국에서 이끌었다. 인쇄술과 증기기관이라는 물질 개벽이 공화정과 민주주의라는 정신 개벽을 낳았다. 그것을 아울러 대서양 혁명이라고 부른다. 근대 문명의 패러다임을 정의했다. 지금 태평양 동쪽에서는 인터넷과 인공지능이라는 물질 개벽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따른 사회 변화를 워싱턴은 절대 주도하지 못한다. 트럼프와 바이든은 미국 혁명 당시 영국 왕 조지 3세만큼이나 시대에 뒤떨어졌다. 신문명의 패러다임을 정의할 디지털 거버넌스는 태평양 서쪽에서 나올 것이다.

한국인은 가장 연결돼 있지만 가장 단절돼 있기도 하다.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모여 살지만 1인 가구 비율이 40%를 넘는다. 우울증 유병률은 오이시디 국가 중 1위로 10명 중 4명이 앓고 있다. 30대 미혼율은 일본을 추월해 40%를 넘었고 남성은 50%가 넘는다. 기계와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사람과 관계는 멀어진다. 역사상 가장 많은 친구를 가졌지만 가장 외로운 세대. 기대 수명은 어느 때보다 높지만 정신은 피폐한 세대. 디지털 세대는 완전히 새로운 정치를 요구한다.

지금 세계는 디지털 이주민이 디지털 원주민을 통치한다. 일종의 식민주의다. 전혀 다른 시공간에 살고 있는 권력자가 나를 지배한다. 한국도 산업화·민주화 세대가 엠제트·알파 세대를 다스린다. 정체성, 정신 건강 등 디지털 세대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기후·생태위기도 마찬가지다. 미래에 없을 사람들이 미래를 담보로 권력을 휘두른다.

디지털 원주민을 위한 정치를 상상한다. 더는 대중이 주체가 아니다. 시민도 인민도 아닌 개인을 위해 봉사하는 권력이 필요하다. 철저히 원자화된 동시에 무한한 네트워크에 접속한 개인이 안전하고 온전할 수 있도록 지켜야 한다. 기계와 융합된 생명도 살맛 나는 세상. 대한민국이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디지털 거버넌스의 솔루션을 제공해줄 나라는 아직 없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