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초가삼간 태우는 방송 중단, 실직자 누가 책임지나

2023. 3. 2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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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밥과 김치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마지막 메모가 유서가 됐다. 이웃집에 메모를 남긴 사람은 30대 시나리오 작가였다. 이웃이 음식을 들고 왔지만, 작가는 숨져 있었다. 2011년, 어쩌다 발생한 사고가 아니라 우리 작가들의 위급한 순간을 알린 사건이다.

10여 년 전 사건이 떠오른 계기는 MBN의 6개월 업무정지다. 2020년 방송통신위원회는 불법 자본금 충당 등으로 방송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MBN에 업무정지 처분을 내렸다. MBN이 과도한 처분이라며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에서 패소하면서 '6개월간 24시간 업무정지'의 시일이 눈앞으로 다가온 셈이 됐다.

급변하는 방송 제작 환경 속에서 6개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방송 한 편을 제작하기 위해 길게는 1~2년, 적어도 두 달여 전부터 준비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6개월이란 시간은 사실상 1년 이상 후유증을 불러올 것이다. 더불어 업무정지 후 다시 원상 복구가 되기까지는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어쩌면 '원상 복구'라는 말 자체가 불가능한 말일 수도 있다. 사실상 '업무정지'란 말에 가려진 '폐업 수준의 불이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방송통신위원회나 법원은 6개월 업무정지라는 극단 처방이 방송사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최선의 시나리오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상황을 불러오는 연출이 될 수도 있다. 방송사에는 방송국 건물 안에서 움직이는 PD나 기자도 있지만, 그들과 함께 일하는 작가들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방송작가라고 하면 드라마 대본을 쓰는 직업군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방송작가의 활동 범위는 훨씬 넓다. 교양 프로그램과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 때도 작가들은 방송 내용을 기획하고, 적재적소에 사용할 영상과 언어를 고민한다. 방송작가들은 대한민국 방송 프로그램의 위상을 'K콘텐츠'라는 고유의 장르로 격상시키는 데에도 큰 몫을 했다.

MBN에서도 많은 작가들이 '나는 자연인이다' '속풀이쇼 동치미' 등의 스테디셀러 프로그램은 물론 '불타는 트롯맨' '돌싱글즈' '고딩 엄빠' 등 새로운 히트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생산해내고 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많은 제작진이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있을 것이고, 방송작가 1000여 명이 여기에 지혜를 모으고 있을 것이다.

MBN의 6개월 업무정지 국면은 이들이 일감을 잃고, 방송업계로 쏟아져 나오게 되는 상황을 뜻한다. 이 인력들이 졸지에 방송가에 쏟아져 나올 경우 선의의 경쟁이 아닌 생계의 경쟁이 시작된다. 방송작가뿐만 아니라 다른 제작 스태프들도 비슷한 처지다. 방송작가의 글값, 방송 인력의 몸값이 더 떨어질지도 모른다. 6개월 업무정지는 단순히 방송 인력의 일자리 부족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방송 생태계를 붕괴시키는 나비효과의 단초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종합편성채널이 출범할 때 많은 방송작가들은 쾌재를 불렀다. 활동 영역을 넓히고 다양한 시도와 콘텐츠 생산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이 열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장은 6개월 업무정지로 닫힐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업무정지가 애꿎은 피해자를 만들고, 방송 생태계까지 흔든다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그 초가삼간을 터 잡아 일하는 이들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김동용 한국방송작가협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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