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일본은 싫어도 애니는 좋다?

전지현 기자(code@mk.co.kr) 2023. 3. 23. 17:2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한일 갈등에
역사와 문화는 별개라는
자기합리화 필요했지만
정상회담이 전환점 되길

김호연의 소설 '불편한 편의점'에서 20대 알바생 시현은 일본 애니메이션 덕후다. 일어과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려 했지만, 2019년 한일 무역전쟁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되자 무산됐다. 당시 한국에선 '노재팬(No Japan·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일본에선 혐한(嫌韓) 시위가 확산됐다. 시현은 개인의 꿈이 외교 문제로 무너지는 경험을 한 후 비로소 사회의 일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불편했다. 그해 겨울, 도쿄로 여행 갔던 지인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신주쿠의 한 식당에서 쫓겨난 후에야 비로소 일본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것을 깨달았다.

1945년 일본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이중적인 잣대로 일본을 대해 와야 했다. 애국심을 의심받지 않으려면 일본을 비난해야 하지만, 일본 여행과 문화 소비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역사와 여행, 문화는 별개라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지금 국내 극장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이 독주하고 있다. 새해 벽두 개봉한 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관객 418만명(23일 현재)을 동원하며 일본 애니 흥행 역사를 다시 썼고, 지난 8일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관객 200만명을 돌파하며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고 있다.

두 작품은 각각 농구를 통한 성장드라마와 자연재해에 맞서는 인간의 희생정신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로 일본 문화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허물어뜨리며 한국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다. 만약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욱일기가 등장했다면 불매운동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1990년대 농구 열풍을 일으켰던 '더 퍼스트 슬램덩크' 상영관에선 3040세대가 추억에 젖어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유년 시절 한국어 더빙으로 방영하는 지상파TV를 통해 봐서 일본 만화라는 거부감이 없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여고생 스즈메와 대학생 소타의 지진을 막기 위한 고군분투를 그렸다. 주인공들은 재앙을 일으키는 붉은 기둥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봉쇄하는 데 목숨을 건다. 신카이 감독은 한국 드라마 '도깨비'의 공간을 넘나드는 문 사용 방법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매일 아침 문을 열고 닫고 일상이 반복되는데 재해는 일상의 단절을 초래해 작품의 모티브로 문을 활용했다.

한국인의 일본 애니 사랑에 대해 그는 "아마도 일본과 한국의 문화와 풍경이 닮아서가 아닐까 생각한다"면서 "풍경과 도시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양국의 마음 형태가 유사하지 않은가 싶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고, 일본인들은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처럼 양국 문화는 정치·외교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향을 주면서 연결돼 왔다. '더 글로리' 등 한국 드라마가 일본 넷플릭스에서 1위를 차지하고 방탄소년단(BTS)이 올해 일본 골든디스크 4관왕에 올랐다. K콘텐츠의 대일 수출액은 2021년 기준으로 수입액의 14배에 달한다.

지난 16일 한일정상회담을 계기로 정부 차원의 문화협력이 늘어날 전망이다. 올해는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한 지 25주년이 되는 해이고, 드라마 '겨울연가'가 2003년 NHK 위성채널에서 방송되면서 시작된 일본 내 한류 20주년을 맞는 해다. 양국의 문화협력 노력이 얼마나 지속될지, 그 결실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일본은 싫지만 문화는 좋다'는 이중 잣대가 필요 없을 만큼, 양국의 심리적 거리가 좁혀지기를 바란다.

[전지현 문화스포츠부장]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