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말기암 환자와 진실

2023. 3. 2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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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4년 반 전 침윤성 방광암으로 방광을 제거한 뒤 소장 60㎝를 잘라내어 조성한 인공방광을 갖고 암환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직까지는 암이 재발한 징후는 보이지 않아 다행으로 여기지만, 암이 언제라도 재발할 수 있다는 걸 늘 염두에 두고 지낸다.

말기 암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가족에게 진실을 말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의 메일을 받을 때가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국내 연구 결과를 소개하곤 한다. '말기 암을 알리는 문제에 대한 환자와 가족의 입장'이라는 논문은, 우리나라의 말기 암 환자 380명과 그 가족 281명을 대상으로 국립암센터에서 연구하여 2004년 국제학술지에 발표한 연구 결과를 알려주고 있다. 이 연구를 위해서 말기 암 환자 본인과 가족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첫 번째 질문은, 환자가 '진실을 알기 원하는가?'인데, 이에 대하여 말기 암 환자 본인은 96%가 '그렇다'고 대답했으나 가족은 76%가 '예'라고 대답했다. 말기 암 환자 본인과 가족의 견해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말기 암 환자 본인의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과연 있을까?

다음은 10여 년 전 필자가 직접 경험했던 사례이다. 68세의 남자분에게 외과에서 개복수술을 시행하였는데, 이미 주변 장기로 췌장암이 퍼져 있고 림프절에도 암이 많이 전이돼 있어서, 완치는 불가능한 상태로 판정하고 수술이 종료되었다. 수술이 끝난 후 환자분의 가족들은 담당 의료진에게, 말기 암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자 본인에게는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따라서 의료진은 환자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고, 진료 과정 내내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 수술이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들은 환자분은 "수술이 잘 됐다고 하는데 내 몸은 왜 이 모양이지?" 하고 불안해했다. 그런 가운데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되어, 수술 받은 지 한 달째 되는 날 양쪽 폐로 암의 전이가 심하게 일어나면서, 의식을 잃은 지 사흘 뒤 세상을 떠났다. 가족과 의료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본인만 모르고 있다가 죽음을 맞은 것이다. 안타까운 일은, 본인이 벌여 놓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을 정리하고 자신의 삶을 마무리할 기회를 가족들에 의해 박탈당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환자를 떠나보내고 나면 '그때 사실대로 알려 드릴 걸' 하며, 가족들은 후회와 회한의 감정을 두고두고 안고 살아가게 된다.

지금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한데, 환자가 자신이 살아온 삶을 하나도 정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지 않도록 본인의 병에 대해 사실대로 알려야 한다. 물론 말기 암 환자에게 병세에 대해 사실 그대로를 알리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비유를 하자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로 여러 쥐들이 모여 결정을 했지만 실제로 방울을 다는 일을 서로에게 미루는 것과 같다. 따라서 사실을 한꺼번에 덥석 말하기보다는 차츰 강도를 높여가며 몇 차례에 걸쳐 전달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진실 알리기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환자의 의식이 나빠져 중환자실로 옮겨진 뒤 세상을 뜨고 나서야 뒤늦게 크나큰 후회를 하는 가족을 많이 봐 왔다. 이들의 회한을 접하며 절대 저런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된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 사실대로 알아야 하는 것은, 한번 태어나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는 인간이 갖는 존엄한 권리이다.

[정현채 서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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