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은 ‘트루먼’을 잘못 읽었다 [아침햇발]

강희철 2023. 3. 2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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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의 좌우명이 새겨진 명패.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5월 방한한 바이든 미국 대통령한테서 트루먼 명패의 복제품을 선물받아 대통령실 책상 위에 놓았다고 한다. <중앙일보>, 대통령실 영상 갈무리

강희철  | 논설위원

“(대통령에 당선되면) 집무실에 출근해서 첫번째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지.” 출연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모든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고 해서, ‘누구한테 미룰 수가 없다’라고 해서 ‘더 벅 스톱스 히어’(the Buck Stops here)라고 딱 붙여놨다고 하는데, 내 책임을 늘 잊지 않게 일깨워주는 상징물을 놔야 되겠죠.” 유튜브 채널 ‘석열이형네 밥집’을 통해 지난해 대선 전 공개된 영상물에서 당시 윤 후보가 한 말이다.

트루먼의 좌우명이 새겨진 명패를 갖고 싶다던 윤 대통령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 덕에 바람을 이뤘다. ‘더 벅 스톱스 히어’에는 ‘결정은 내가 해’, ‘책임도 내가 져’라는 두가지 뜻이 내포돼 있다. 이 말이 유래한 옛 미국 포커판에서 딜러는 ‘벅’, 즉 사슴뿔 손잡이가 달린 칼(buckhorn knife)을 권위 삼아 게임을 주재하고 책임도 함께 졌다. 그래서 동전의 양면 같은 결정과 책임 중 어느 한쪽만 강조하면 메신저(트루먼)의 이미지만 취하고 메시지 자체는 버리는 결과가 된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제3자 변제’ 방안을 대통령의 결단으로 묘사한 대통령실 쇼츠 영상이 그러했다.

기왕 트루먼에게 꽂혔다면 명패만 탐할 게 아니라, 고별연설까지 챙겨 봤어야 한다. “대통령의 가장 큰 직무는 거의 매일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서류는 한동안 정부를 돌아다니다가 결국 이 책상에 도착합니다. 서류가 갈 곳은 더 이상 없습니다. 대통령이 누구든 결정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떠넘길 수 없습니다. 그게 대통령의 일입니다.”(1953년 1월15일)

트루먼이 말한 ‘결정’ 또는 ‘책임’이 독단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은 기자회견 횟수에 나타나 있다. 7년 남짓한 임기 동안 월평균 3.5회나 공식 기자회견장에 섰다. 거의 매주 회견을 한 셈이다. ‘미국 대통령 프로젝트’(The American Presidency Project) 통계에서 지난 100년간 재임한 대통령 가운데 회견을 그보다 더 많이 한 사람은 쿨리지(6.1회) 등 3명에 불과하다. 윤 대통령이 임기 초에 했던 것과 비슷한 약식 문답(도어스테핑)을 제외하고도 그 정도다. 바이든(0.9회), 트럼프(1.8회)와 견줘 보면, 얼마나 자주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반면, 윤 대통령은 설명하길 꺼린다. 질문도 받지 않는다. 당선자 시절엔 “언론과의 소통이 국민과의 소통”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18일 마지막 출근길 문답 이후 언론 앞에 서서 질문을 받은 적이 없다. 집권 2년차를 맞은 2023년 신년 기자회견은 신년사 낭독으로 때우고 말았다. 묻고 답하는 상호작용이 배제된 일방적 발언을 소통이라고 생각할 국민이 얼마나 될까.

최근 사례만 봐도 일본 언론들에는 미주알고주알 많은 말을 하면서 정작 국내 언론은 만나지 않았다. 논란이 커지자 국무회의에서 장황한 대국민 담화만 느닷없이 생중계하고서 끝이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주 69시간’ 논란도 뒷짐을 진 채 외마디 지시만 던지고 있다. 익숙한 풍경이다. 지난해 ‘만 5살 취학’ 논란 때, 고위 공직 후보자의 의혹이 꼬리를 물고 터질 때에도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다. “참모 뒤에 숨지 않고, 정부의 잘못은 솔직히 고백하겠다”던 아름다운 약속은 빈말이 됐다.

대선 공약도 다르지 않다. 남은 임기를 생각하면 웬만한 건 기다려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특별감찰관(특감)의 부재는 다른 문제다. 법률가 출신인 대통령이 위법인 줄 알면서도 장기간에 걸쳐 고의로 방치하고 있다. 지난해 당선 직후 이맘때 ‘특감 폐지’ 방침이 보도되자 “법률에 따른 국회의 입법사항”이라며 임명은 당연하다고 일축한 사람이 윤 대통령이다. 5년 임기 내내 특감을 비워둔 문재인 정부는 “범위가 좁고 수사권이 없어서”(조국 전 민정수석)라는 궁색한 변명이라도 했지만, 윤 대통령은 그조차도 없다.

대통령의 설명 의무를 명시한 법은 한국에도 없고, 미국에도 없다. 그럼에도 트루먼은 부지런히 설명하고 답변했다. ‘더 벅 스톱스 히어’의 진의는 최소한 독단이 아니다. 트루먼은 상원의원 시절에 이런 말도 했다. “열기를 견딜 수 없으면, 주방에 머물지 마라.”(If you can't stand the heat, get out of the kitchen) ‘석열이형네 밥집’을 찍느라 뜨거운 화구 앞에 서본 윤 대통령은 그 뜻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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