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 칼럼] 금융시장 고래 풀려면, 은산분리 완화가 답

송기영 기자 2023. 3. 23.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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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은행 돈 잔치’ 비판 이후 금융 당국이 은행업 독과점을 깨기 위해 태스크포스(TF)까지 꾸렸지만, 뾰족한 수는 없어 보인다. 공고한 5대 금융지주 체제를 흔들기 위해선 시장에 ‘신규 플레이어’를 진입시키거나, 기존 플레이어가 싸울 수 있는 판을 깔아줘야 한다.

전자는 카카오뱅크, 케이뱅크, 토스뱅크를 통해 그 효과가 미미하다는 걸 체득했다. 후자 역시 만만치 않다.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시장 점유율은 국민은행 18.4%, 우리은행 14.9%, NH농협은행 14.8% 신한은행 14.6%, 하나은행 14.4%다. 사이 좋게 시장을 5등분해 나눠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평화로운 시장 환경에서 싸울 필요가 있겠는가.

은행 독과점 체제를 깨려면 메기만으론 부족하다. 은행과 체급이 맞는 고래를 풀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 금융시장은 고래를 풀기 힘든 생태계다. ‘금산분리(금융과 산업자본의 분리)’라는 낡은 규제가 막고 있어서다. 금산분리는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서로의 업종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것을 금하는 규제다. 현행 은행법은 비금융사가 은행 주식을 4%까지(인터넷은행은 최대 34%)만 보유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우리의 금산분리는 엄밀히 말하면 은산분리(은행과 산업자본의 분리)다. 은행을 제외하면 증권, 보험, 카드 등은 대기업 진출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은산분리로 혁신성 있는 기업의 은행산업 진출이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고, 은행지주사의 신사업 진출도 쉽지 않다. 세계적으로 산업 간 장벽이 허물어지는 ‘빅블러(Big Blur)’ 현상이 가속화하는데 우린 낡은 규제로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미국과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20여년 전 은산분리를 완화했다. 일본은 1997년에 산업자본의 은행지분 보유 한도 20%를 폐지했고, 미국은 1999년 그램-리치-브라일리 법안(금융산업현대화법안)으로 사실상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게 됐다. 전자상거래·지급결제·환전·송금·대출·보험·자산관리 등에 진출한 혁신 기업을 통해 창조적 파괴와 고용확대가 이뤄지고 있다.

은산분리 완화는 금융당국이 TF를 통해 고민하는 문제의 좋은 해법이 될 수 있다. 은행과 산업의 진입 장벽을 낮추면 금융시장 경쟁이 촉진된다. 금리를 낮춘 대출상품이나 새로운 투자상품이 출시돼 금융소비자 편익이 증대될 수 있다.

정부나 정치권의 입김에서 보다 자유로운 산업자본이 은행권에 진출하면 외풍에 견딜 체력도 기를 수도 있다. 금융지주사 최고경영자(CEO) 연임 또는 교체 때마다 내부 인사들이 정권에 줄을 서고, 파벌 싸움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악습으로 은행들이 관치를 자처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금융 당국과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한국에서 삼성전자와 같은 글로벌 은행이 나오길 오랜 기간 희망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과연 삼성전자에 주인이 없었다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삼성전자는 창업주 이병철 회장부터 이건희 선대 회장 그리고 이재용 현 회장까지 세계 무대에서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고 혁신을 이어온 기업가 정신의 결과다. 오너십이 없는 은행에 이런 기업가 정신을 기대하긴 힘들다.

대표적인 은산분리 완화 반대론자였던 윤석현 전 금융감독원장은 ▲재벌의 사금고화 ▲은행과 소유기업의 이해상충 ▲시스템리스크 확대 등을 그 이유로 꼽았다. 2017년 카카오뱅크와 케이뱅크가 출범한 이후 이것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재벌의 사금고화 문제는 대주주 신용공여 금지, 법인 대출 금지, 주기적인 대주주 적격성 심사 등으로 이중삼중 좌물쇠를 걸었다. 어떤 인터넷은행도 모기업과 은행 간 이해상충 문제로 사업을 하지 못하고 있단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모기업 부실이 은행으로 전이된다는 시스템리스크 우려는 현재 금융 당국의 감독·감시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카카오 같은 대기업이 무너지면 그 리스크는 카카오뱅크를 넘어 대한민국 전체로 확산된다. 애초에 모기업 부실이 은행으로 번진다는 지엽적인 사고로 이 문제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은 삼성은행 등장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은행의 삼성전자는 왜 나오지 않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은산분리는 1961년에 만들어진 낡은 규제다. 당시에는 필요한 규제였지만, 지금 시장 상황과는 맞지 않는다. 글로벌 플레이어를 키우려면 그에 맞는 국제 기준을 도입해야 한다.

무엇보다 박정희 정권에서 만들어진 은산분리법을 좌파 시민단체와 더불어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진정 은행산업의 발전을 원하고 관치가 사라지길 바란다면 은산분리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송기영 금융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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