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죽음 뒤 어머니는 투쟁가가 됐다…흑인 린치 사건 다룬 영화 ‘틸’[리뷰]

오경민 기자 2023. 3. 23.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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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틸>에서 에밋(오른쪽·제일린 홀)은 미국 남부 미시시피에 사는 친척들을 만나러 여행을 떠난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우리는 자식을 잃고 투사가 된 어머니를 여럿 알고 있다. 영화 <틸>의 메이미(대니얼 데드와일러)도 열네 살 아들 에밋 틸(제일린 홀)을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손에 잃은 뒤 흑인 인권을 위해 싸우는 투쟁가가 됐다. 영화는 1955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에서 실제 벌어졌던 ‘에밋 틸 피살 사건’을 다룬다.

메이미와 에밋 모자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살았다. 종종 인종차별을 당하지만 남부보단 사정이 나았다. 남부에서는 모든 공공시설에서 흑백분리가 합법적으로 이뤄졌다. KKK 등 자경단에 의해 흑인 민권운동가들이 피살당했고, 마을 곳곳에서도 백인 집단이 사소한 이유로 흑인을 죽이는 린치가 횡행했다. 살인범들은 제대로 된 수사나 재판도 받지 않았다.

에밋(제일린 홀)은 미시시피 한 식료품점에 들어가 일하던 캐롤린 브라이언트(헤일리 베넷)에게 추파를 던졌다는 이유로 린치의 대상이 된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메이미(대니얼 데드와일러)는 깊은 슬픔에 빠진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사촌들을 만나러 미시시피에 간 에밋도 린치 대상이 됐다. 에밋은 어느날 낮 식품점에서 일하는 백인 여성 캐롤린 브라이언트(헤일리 베넷)에게 추파를 던진다. 이틀 뒤 밤 캐롤린의 남편 로이와 그의 이복형제 J W 마일럼이 에밋이 묵고 있는 집으로 들이닥쳐 “건방진 깜둥이의 버릇을 고쳐주겠다”며 그를 납치해 간다. 에밋은 며칠 뒤 인근 텔라하치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얼굴은 폭행과 고문으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몸도 만신창이가 됐다. 그가 끼고 있던 반지로 신원을 확인한 메이미는 깊은 슬픔에 빠진다.

영화는 메이미의 변화에 주목한다. 공군 유일의 흑인 직원인 메이미는 자신과 에밋의 안전한 매일을 위해 힘써왔다. 그는 에밋을 남부에 보낼 때 매우 불안해한다. 자기 일이 아니라 느껴온, 남부 흑인들의 상황이 아들에게 미칠 것이 염려됐기 때문이다. 에밋의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후 흑인 민권운동에 나서달라는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 인사들의 제안을 메이미는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다”며 여러 번 거절한다. 그는 아들의 시신을 되찾고 아들을 살해한 범인들이 죗값을 치르길 바랄 뿐이다.

영화 <틸>의 메이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연단에 서서 “남부 흑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그냥 남의 일이려니 했다. 이젠 깨달았다. 세상 어떤 일도 방관해서는 안 되는 우리 모두의 일”이라고 말한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메이미는 숨이 넘어갈 듯한 가운데서도 처참하게 훼손된 아들의 시신을 꼼꼼히 살펴본다.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과 판사에 의해 불공정하게 재판이 진행되지만 비열한 질문에도 눈물을 참으며 꿋꿋이 증언한다. 이 모든 일을 겪어낸 후 메이미는 자신과 아들의 이야기를 ‘모두의 이야기’로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영화는 살해 장면 등 잔혹함을 재연하지 않지만 일상을 죄고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당시의 흑인 차별이 살에 와닿는 듯 느껴진다. 에밋이 잡혀가던 날, 흑인 목사는 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백인들이 그를 끌고 가는 동안 “제발”이라고 밖에 호소하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저항했다간 일가족이 몰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그의 무력한 얼굴을 카메라는 오래도록 비춘다. 재판에 증인으로 서기 위해 미시시피에 간 메이미는 피살 위험에 법정 근처에 묵지 못한다. 에밋의 시신을 본 한 흑인 남성은 법정에 증인으로 서기까지 오래도록 고민한다. 이 동네에서 백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살아남은 흑인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에밋 틸을 죽인 백인 두 명은 아무 대가를 치르지 않고 풀려난다. 메이미는 이후 흑인 민권운동에 헌신한다. 밥 딜런은 ‘에밋 틸의 죽음’이라는 노래를 발표해 그의 이야기를 널리 알렸다. 사건은 남부 흑인 민권운동의 촉발제가 됐다. 지난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린치를 연방 증오범죄로 규정하고 최고 징역 30년형에 처하는 ‘에밋 틸 안티린칭 법안’에 서명했다. <틸>을 연출한 치논예 추쿠는 영화가 제95회 아카데미 최종 후보에서 탈락하자 “우리는 매우 공격적으로 백인성을 옹호하고 흑인 여성을 향한 여성혐오를 영속화하는 세상에 살며 그런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화는 22일 개봉했다.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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