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를 빙자한 ‘납치’…러시아로 보내지는 우크라이나 아동들 [플랫]

플랫팀 기자 2023. 3. 2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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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형사재판소(ICC)가 우크라이나 아동들을 러시아로 불법 이주시킨 혐의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한 가운데, 우크라이나 점령지 아이들에 대한 ‘구조’를 빙자해 러시아가 ‘납치’를 저지른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러시아는 전쟁 고아 뿐 아니라 부모가 있는 아이들도 전쟁의 혼란을 틈타 러시아로 이주시킨 뒤, 아동들에게 양육권 요청 동의서에 서명하게 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2년 11월 9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보로디안카시의 파손된 건물 앞에서 한 남성이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게티이미지

19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은 세 아이와 생이별을 했다가 가까스로 재회한 우크라이나 남동부 마리우폴 주민 예브헨 메제비(40)의 사연을 전했다. 크레인 운전기사로 일하며 세 아이를 홀로 키우던 메제비는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세 아이와 함께 방공호 등을 전전하며 대피 생활을 했다.

그는 러시아의 포격으로 많은 의료진이 떠난 병원에서 시신 운반을 도우며 방공호에서 아이들을 돌봤지만, 지난해 3월17일 러시아군이 도시의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열세살 아들 마트비가 이날 병원 방공호에서 잠을 자고 있는 그를 흔들어 깨웠다. “아빠, 계단에 러시아 군인들이 있어요….”

마리우폴은 전쟁 초기 잔혹한 전쟁 범죄로 민간인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곳이다. 메제비 가족이 숨어 있던 병원에 러시아 군인들이 들이닥친 날, 러시아군은 민간인들이 대피해 있던 마리우폴 극장에도 무차별 포격을 가해 600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 극장 앞에는 아이들이 피신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러시아어로 ‘어린이들’(дети)이라고 쓰인 표식이 있었다.

지난해 3월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6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리우폴 극장의 포격 전 모습을 찍은 위성 사진. 극장 앞에 러시아어로 어린이(Дети)를 뜻하는 글자가 쓰여 있다. 막사테크놀로지/AP연합뉴스

이후 메제비는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됐다. 2016년부터 4년간 우크라이나군에 복무했던 과거 이력이 문제가 됐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전쟁 포로들이 수감돼 있는 도네츠크주 올렌빈카의 감옥에 그를 구금하며 수감 기간이 “2시간이 될 수도 있고, 7년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2022년 11월 9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지역 보로디안카시의 의 파손된 건물 앞에서 어린이들이 놀고 있다. 게티이미지

메제비는 45일 만에 풀려났지만, 그 사이 13세 큰 아들과 9세와 7세 두 딸의 행방이 묘연했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결과 아이들이 모스크바의 ‘수용소’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용소에 연락해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모스크바로 향하는 여비를 마련하던 와중 큰 아들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5일 후면 ‘캠프’가 문을 닫아 조만간 고아원이나 위탁 가정으로 가게 된다는 소식이었다.

이제 돈을 모을 시간도 없었다. 그는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는 “점령지에서 러시아로 건너가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단지 내 아이들을 데려오겠다는 것인데도 계속해서 심문을 받아야 했다”면서 “(수용소를 운영하는) 러시아 아동옴부즈맨 사무소는 아이들을 데려가려면 친러 반군 공화국인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의 사회복지서비스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아동옴부즈맨 사무소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ICC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받은 러시아 아동인권 담당 위원 마리야 리보바벨로바가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결국 메제비는 수많은 서류를 작성하고 수용소 책임자 등 여러 관계자들과 면담한 끝에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수용소에 거대한 문과 무장한 경비원들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마지막 문서를 작성하는 동안,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이들이 달려오고 우리는 오랫동안 껴안았습니다.” 그는 아이들과 재회한 뒤 마리우폴로 돌아가지 않고 현재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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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제비는 ICC가 체포영장을 발부한 후 푸틴 대통령이 보란듯이 전쟁범죄가 자행된 마리우폴을 방문한 것을 보고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는) 고작 열세살 어린 아이에게 자신과 여동생들에게 대한 양육권 요청서에 서명하도록 했다”면서 “지금도 나와 내 아이들이 겪은 일을 믿을 수 없지만, 나는 아이들을 되찾았고 다행히 우리는 함께 있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제형사재판소의 체포영장 발부 이틀 후인 19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남동부 도네츠크주 마리우폴시의 점령 지역을 둘러보고 있다. 러시아대통령공보실영상. 타스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정부에 따르면 전쟁 발발 후 우크라이나 어린이 1만6000여명 이상이 고아원이나 보호시설에서 납치돼 러시아로 보내졌다. 러시아도 지난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루한스크·도네스크) 지역 아동 2000명 이상을 ‘구조’해 본국으로 보냈다고 인정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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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로 보내진 우크라이나 아동들은 고아원에 보내지거나 러시아 가정에 입양됐다. 이 같은 일을 주도해 체포영장이 발부된 리보바벨로바 역시 마리우폴 출신 남자아이를 비롯해 18명의 아동을 입양한 것으로 전해졌다. 메제비의 아이들처럼 부모가 아이들을 찾아 우크라이나로 다시 송환된 아이들은 119명에 불과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앞두고 지난달 모스크바에서 대대적으로 개최한 ‘애국 콘서트’에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특히 이 콘서트 무대에 올라 러시아 군인에게 감사를 표했던 우크라이나 자매는 10개월 전 마리우폴에서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어머니를 잃은 것으로 알려져 세계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ICC는 러시아의 아동 불법 이주가 ICC 로마 규정 8조2항에 명시된 전쟁 범죄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선명수 기자 sms@khan.kr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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