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제 2의 유관순으로 불린 윤형숙 열사…외팔이 선생의 비운의 삶”

윤주성 2023. 3. 23. 10: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윤형숙 열사, 여수 출신으로 선교사 도움 받아 1918년 광주 수피아 여학교 고등과 진학"
"수피아 여학교서 박애순 선생과 운명적 만남...비밀 학생단체인 '반일회'에 적극 참여"
"광주 3.1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왼팔 잘려...일경 취조에 이름을 '윤혈녀'라고 대답"
"4개월 옥살이 뒤 여수 등지서 외팔이 선생으로 생활...여순 사건 때 손양원 목사와 함께 처형"
[KBS 광주]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 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S_AUOUKV36k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 윤주성 앵커(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윤주성: 오늘 이야기 주제는요?

◆ 노성태: 3월에는 계속해서 광주 3.1운동과 관련된 잊혀진 숨은 주역들에 관한 말씀을 드리고 있잖아요. 민족 대표 33인 중 호남 최초의 인물이었던 지강 양한묵 선생 이야기도 드렸고 그리고 광주 3.1운동을 견인해냈던 경성의전 학생이던 김범수 선생 그리고 앞 전에는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을 총 주도했었던 박애순 선생 이야기를 해드렸는데요. 오늘은 광주 3.1운동에 앞장서서 태극기를 흔들다가 일본 헌병이 내리친 칼에 왼팔에 큰 부상을 입었고 그것 때문에 왼손을 잘라야 했었던 제2의 유관순이라고 불리는 분이 윤형숙 여사인데 당시 수피아 여학교 고등과 2학년 학생이었습니다. 그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윤주성: 일본 헌병이 내리친 칼에 왼팔이 잘린 분이 수피아 여학생 윤형숙 열사이고 제2의 유관순이라고 불리는 분이군요. 윤형숙 열사, 저에게는 조금 생소한데요. 언제 어디서 출생한 분인가요?

◆ 노성태: 여수에 가면 웅천 공원이라고 있습니다.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선 여수 출신 분들을 기리는 항일 독립운동 기념탑이 웅천 공원에 서 있는데요. 바로 기념탑 옆 부조 벽에는 일본 헌병 칼에 왼쪽 팔이 잘려나갔던 윤형숙 열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여수 웅천 공원에 윤형숙을 기리는 조형물이 조성됐다는 것은 윤형숙의 고향이 여수이기 때문이지요.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1900년 9월 13일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에서 태어납니다.

◇ 윤주성: 윤형숙 열사, 여수 출신인데 3.1 만세 운동 당시 광주 수피아 여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니까 여수에서 광주로 유학을 온 것이군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윤형숙이 광주 3.1 만세 운동에 앞장서서 만세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광주에 있는 아마 당시 유일한 중등 여자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수피아 여학교에 진학했기 때문인데요. 윤형숙은 말씀드렸던 것처럼 1900년 여수에서 태어났지만 7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순천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집에 맡겨지게 됩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윤형숙 열사, 오른쪽 두 번째)


선교사의 도움으로 순천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리고 3.1운동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18년, 광주 양림리 지금은 양림동이지요. 양림동의 수피아 여학교 고등과에 진학했는데요. 그때 윤형숙 열사의 나이가 18살이었습니다.

◇ 윤주성: 선교사의 도움으로 광주 수피아 여학교에 진학했고 그때가 1918년이었으니까 3.1 운동 발발 1년 전이었는데 수피아 여학교에 다닐 당시 윤형숙은 어떤 학생이었는지 궁금하네요.

◆ 노성태: 수피아 여학교는 1908년도에 '배유지'라고 하는 선교사에 의해서 광주숭일학교와 함께 설립된 광주 지역 최초의 중등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수피아 여학교에 진학해서 만난 분이 서두에도 말씀을 조금 드렸는데 수피아 여학교 3.1 운동을 지도했던 박애순 선생이었고 박애순 선생으로부터 민족이 처한 현실 그리고 독립을 위해서 학생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교육받고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박애순 선생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윤형숙은 수피아 여학교 학생으로 구성된 비밀학생단체인 '반일회'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하게 됩니다.

◇ 윤주성: 박애순 선생과 운명적인 만남이었네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윤주성: 윤형숙 열사가 이렇게 '반일회'라는 단체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가는 가운데 광주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이군요.

◆ 노성태: 네.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 30분경 광주천 큰 장터에서 광주 3.1 만세 운동의 리더였던 나주 출신 김철을 비롯해서 300여 명이 모여서 독립을 선언하고 대한 독립만세, 조선 독립만세를 외치게 됩니다. 수피아 여학교는 이미 박애순 선생의 지도하에 수피아 홀에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아까 큰 장터에서 대한 독립만세를 부를 무렵에 수피아 여학교 학생 전원 30여 명이 교문을 박차고 숭일학교 학생과 함께 작은 시장에서 시위대와 합류하게 되는데 시위대 맨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을 주도했던 학생 중에 윤형숙 열사가 있었습니다.

◇ 윤주성: 윤형숙 열사 광주 3.1 만세 운동 당시 대열의 맨 앞에서 행진을 주도했는데 왼팔은 이때 잘리게 되는 것인가요?

◆ 노성태: 1,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광주 작은 장을 출발해서 충장로 일대에서 시가 행진을 했고 그리고 지금 충장우체국인데요. 이 앞에 도착하자 일본 기마 헌병대 경찰이 출동했고 이를 헌병과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서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게 됩니다. 앞장서서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던 윤형숙을 향해서 일본 헌병에 달려들었고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던 왼팔을 일본 헌병이 군도로 내려치게 되는데 이때 왼쪽에 큰 상처 자상을 입었고 뒷날 후유증으로 왼팔을 자르게 됩니다. 윤형숙은 피를 흘리면서도 왼손의 국기를 오른손에 집어 들고 더 큰 목소리로 대한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합니다.

◇ 윤주성: 일본 헌병이 내리친 칼에 윤형숙 열사가 왼팔을 크게 다쳤고 이후 절단까지 하게 되는군요. 당시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던데요.

◆ 노성태: 광주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3월 10일이고요. 그다음 날 11일 조선 2대 총독이 하세가와 요시미치 당시 총독이었는데 전라남도 방면의 정황이란 제목의 급전을 일본 본국에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전보 내용에 보면 "광주에서 기독교가 주동한 군중 폭동이 일어났는데 이중 조선인 한 명이 부상당했고 경찰이 해산시켰음" 이런 전보를 보내게 됩니다. 3월 10일 만세운동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육군성에 보고한 것이었는데 여기에서 이례적으로 부상자 1명이 있다고 언급을 하고 있잖아요. 이날 부상을 당했던 사람, 그분이 바로 오늘 말씀을 드리고 있는 윤형숙 열사였던 것입니다.

◇ 윤주성: 윤형숙 열사를 '윤혈녀'라고 부른다고도 하는데 피 혈 자, 계집 녀 자를 쓴 '혈녀'로 부르는 이유도 궁금하네요.

◆ 노성태: 왼팔에 큰 상처를 입은 윤형숙 열사, 응급 치료를 받고 경찰의 취조를 받게 되는데 경찰이 이름을 묻습니다. ‘나는 윤혈녀다.’ 이렇게 대답을 하니까 경찰이 재차 네 본명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윤형숙은 보다시피 피를 흘리는 계집 '윤혈녀'라고 당당하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윤형숙 열사)


이후에 혈녀는 윤형숙의 다른 이름이 되었고 또 수피아 여고에 가면 3.1운동 관련된 기념 동상에 서 있는데 거기에도 윤형숙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괄호 열고 '윤혈녀'가 이렇게 함께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1919년 4월 30일 그러니까 두 달 뒤에 광주지방법원에서는 윤형숙 열사에게 징역 4월 형을 선고했고 그리고 4년간 전남을 떠나라고 하는 격리 조치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 윤주성: 4개월의 옥살이 이후 윤형숙 열사는 어떤 삶을 살았나요?

◆ 노성태: 외팔이가 된 윤형숙, 또 전남을 떠나라는 4년간 격리 조치 명령을 함께 이행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윤형숙은 어릴 적 자신을 돌봐주었던 순천의 선교사 부부에게 찾아가서 그 선교사 부부의 도움으로 함경도 원산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 마루다 신학교가 있습니다. 마루다 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고 그리고 신학교 졸업 이후에는 유치원 교사 또 전주 기독교학교 사감, 여수 봉산학교 전도사 등으로 이렇게 활동을 하게 되는데요. 왼팔이 잘린 후유증으로 한쪽 시력마저 잃게 됩니다. 학생들은 왼팔이 잘렸던 윤형숙을 '외팔이 선생'이라고 불렀고 당시 여수에서는 '외팔이 선생'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 윤주성: '외팔이 선생' 윤형숙, 마지막 모습도 궁금하네요?

◆ 노성태: 그녀는 고향 여수에서 교회 학생들에게 민족 교육 운동에 앞장서다 해방을 맞게 됩니다. 아마 해방을 맞았을 때 감동, 다른 분과 조금 더 달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해방이 되자 '외팔이 선생' 윤형숙이 태극기를 손수 그려서 거리로 나와서 시민에게 나누어주며 함께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런데 해방의 기쁨도 잠시뿐 여수에서는 1948년 여수·순천 11.9 사건이 일어나잖아요. 비극 속에 휘말렸고 또 여수·순천 사건이 채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인민군이 여수까지 내려왔고요. 그리고 인민군들에게 기독교인들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에. 당시 여수 애양의원에서 나환자를 돌보던 '손양원 목사'라고 유명한 분이 있는데 그분과 함께 인민군에게 처형되고 마는데 이때 윤형숙의 나이가 52세였습니다.

◇ 윤주성: 윤형숙 열사가 정말 '제2의 유관순'으로 불릴만도 하군요. 어디에서 그녀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 노성태: 말씀드렸던 것처럼 여수 웅천 공원에는 그녀를 기리는 부조물이 있고요. 그리고 그가 다녔던 수피아 여학교, 수피아여고 정문에는 기념 탑이 건립되어 그녀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고향에 무덤이 안장되어 있는데 묘비석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왜적에게 빼앗긴 나라 되찾기 위하여 왼팔과 오른쪽 눈도 잃었노라. 일본은 망하고 해방되었으나 남북 좌·우익으로 갈려 인민군의 총에 간다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 윤주성: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https://news.kbs.co.kr/special/danuri/2022/intro.html

윤주성 기자 (yjs@kbs.co.kr)

Copyright © KB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