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티아고 - 운탄고도를 가다] 5. 검은먼지 낀 구절양장 지나니 푸른 희망 새긴 하늘이

유주현 2023. 3. 2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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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예미역 출발 철로와 나란히 걷는 길
꽃꺼끼재까지 28.76㎞ 9시간 가량 소요
운탄고도 만든 강제징집의 아픈 사연
석탄산업 호황기 열차·광부 이야기 서려
새가 날아가는 형상 ‘새비재’ 이국적 풍경
타임캡슐공원 과거-미래 희망 연결
산등성이 폐석·굽이굽이 고갯길 인상
▲ 운탄고도4길(지도) 새비재의 고랭지 채소밭.

운탄고도 4길은 정선 신동읍 예미리 예미역에서부터 시작된다. 예미리는 일제 강점기시대 광산 개발로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들어 일본 이름을 단 술집과 병원 등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곳이다. 해방이후에는 태백산맥 일대에 엄청난 무연탄이 매장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1993년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으로 주변 광산들이 모두 폐광하면서 이 지역의 경기도 휘청거렸지만 예미농공단지를 비롯한 생태탐방로, MTB코스, 타임캡슐공원, 동강전망자연휴양림 조성 등을 통한 상경기 회복에 나서면서 안정을 되찾고 있다.

운탄고도 4길=과거에 묻어 둔 미래를 찾아가는 길

신동읍 예미리에 위치한 예미역에서 출발해 철로와 나란히 난 국도 421호선 인도를 따라 걸으며 마주치는 풍경은 예전 석탄산업 호황기때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당시 석탄을 운송하던 열차의 기관사가 보았던 그 길과 크게 변함이 없다.

철로를 뒤로 하고 예미농공단지를 거쳐 가다보면 함백역 가는 길과 타임캡슐공원으로 가는 갈래길이 만난다. 이 곳 갈래길 초입에는 백반전문집인 양지식당이 손님들을 반긴다. 포장된 타임캡슐공원 진입로가 바로 새비재로 가는 길이다. 고개를 이룬 산의 형상이 새가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이곳은 오래 전부터 화전민(火田民)들이 정착해 터를 일구고 살아왔으나 1970년 초 정부의 독가촌 정비 사업으로 지금은 고랭지 채소 등을 재배하는 사람들만이 살고 있다. 새비재 능선에서 바라본 넓은 채소밭은 여름철 초록으로 뒤덮인 스위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연상케 한다.

운탄고도 4길 새비재로 가는 길

이 길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있다. 바로 타임캡슐공원이 조성돼 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배우 전지현과 차태현이 2년 후를 약속하고 타임캡슐을 묻었던 장소다. 타임캡슐과 소나무는 고원의 바람을 맞으며 사람들을 기다리고, 찾아온 이들의 소망과 함께 그들의 과거가 되고 미래를 연결해준다.

석탄을 캐며 미래의 삶을 얘기했던 광부와 가족들의 슬픈 이야기, 생사의 갈림길에서 운탄고도를 만들었던 강제징집자들의 아픈 사연, 배고픔을 잊기 위해 꽃을 꺾어 먹었던 주민들의 눈물겨운 인생사들이 길따라 스며있는 듯 하다.

어느 전설 속 수도승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했고, 잠시 떠났던 세상에 돌아왔을 때 그곳은 이미 그가 살던 세상이 아니었다고 했다. 지금이 과거의 현재, 미래의 현재, 아니면 시간 밖의 어떤 시간에 속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연을 꼭꼭 눌러담은 타임캡슐이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켜주듯, 소망을 되뇌며 걷는 길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공간을 이어준다.

새비재를 지나 꽃꺼끼재까지 첩첩산중으로 꼬불꼬불 난 도로는 석탄산업이 호황을 이룰때 석탄을 실은 지무시(트럭)가 오가며 검은 먼지를 날리던 길이었다. 지무시는 하루 3교대로 캐낸 석탄을 싣고 동쪽 만항재에서 올라와 정암산, 백운산, 두위봉, 질운산 산허리를 거쳐 새비재에 이르러서야 함백역을 향해 고개 밑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석탄을 캐내기 이전 이 길은 수많은 야생화가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었다. 보릿고개처럼 어려운 시절 이 길을 이용했던 사람들은 진달래 꽃잎으로 허기를 달랬다. 그 힘든 고갯길을 넘으며 아이들은 학교에 다녔고, 청년들은 꽃을 꺾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운탄고도 4길의 종착지점인 화절령(花절嶺), 바로 꽃꺼끼재다.

이 길은 석탄생산 활황기에 석탄을 운반하던 운탄고도 길이 됐다. 한국 근대산업의 근간을 이뤘던 운탄고도를 따라 걷다 보면 산 등성이로 보이는 수많은 폐석과 아름다운 꽃들, 도로 옆 아찔한 낭떠러지, 저 멀리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산들의 모습은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그때와 다름이 없다.

이 운탄고도 4길은 440리 운탄고도 길 가운데 가장 긴 코스다. 예미역에서 출발, 예미랩, 타임캡슐공원, 새비재, 사동골을 거쳐 화절령까지 28.76㎞ 구간으로, 소요시간만 9시간이 넘는다.

유주현 joohyun@kado.net

 운탄고도 4길 주변 명소들

△예미역=운탄고도 4길의 시작점인 예미역은 신동읍 예미리에 위치한 태백선과 함백선의 철도역이다. 1977년 역사가 준공됐다. 함백역을 경유해 조동역까지 우회하는 함백선과 본선인 태백선이 이곳 예미역에서 나눠진다.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12회 정차한다. 2015년 1월 22일부터 정선아리랑열차(A-Train)가 운행을 시작했고, 2020년 3월 2일 무궁화호로 전환해 영동선 누리로(청량리~동해) 운행을 개시했다.

△타임캡슐공원=신동읍 엽기소나무길에 있는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촬영지로 알려진 공원이다. 영화에서 차태현과 전지현이 2년 후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타임캡슐을 소나무 밑에 묻었던 곳이다. 그 소나무에 ‘엽기소나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그 곳을 중심으로 12개월을 의미하는 12개의 방사형 원형블록이 설치돼 있고, 블록 당 400여개의 타임캡슐 설치가 가능하다. 이용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함백역=운탄고도 4길에 포함되지 않지만 꼭 한번 들러보기를 권하고 싶은 역이다. 1957년 3월 영월~함백을 잇는 함백선의 개통과 함께 문을 열었다. 고한의 삼탄, 사북의 동원탄좌, 신동의 함백광업소는 정선에서 규모가 컸던 탄광이었다. 그러다 1993년 광업소가 문을 닫으면서 함백역도 기능을 잃었다. 2006년 10월 철도시설공단이 역사가 낡았다는 이유로 주민들 몰래 허물자 주민들은 힘을 모아 다시 역사를 짓기 시작해 2년 뒤 옛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예미랩=우주 구성 물질 ‘암흑 물질’을 연구하기 위한 ‘지하 연구실’인 예미랩이 신동읍 예미산 지하 1000m에 고심도 지하실험시설로 조성됐다. 예미랩이 완공됨에 따라 본격적인 암흑물질 탐색과 중성미자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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