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 공해' 현수막은 어떻게 거리를 점령했나 [여의도 별별]

이성택 입력 2023. 3. 23. 04:30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봄꽃보다도 먼저 길거리를 뒤덮은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현수막 경쟁을 보면 '아이들이 볼까 봐 두렵다'는 생각부터 든다.

정책 소개보다는 상대 정당을 비방하고 저주하는 내용으로 양당이 현수막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엔 상대 정당에 나쁜 이미지를 덧칠하기 위해 비방 현수막에 일부러 상대 정당의 상징색을 가져다 쓰는 전략도 구사한다.

그런데 정당이 거는 현수막은 이런 규제를 받지 않아도 되도록 국회가 법을 바꿨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24일 인천 미추홀구 주안역 앞에 정당 현수막들이 걸려 있다. 인천시 제공

봄꽃보다도 먼저 길거리를 뒤덮은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현수막 경쟁을 보면 '아이들이 볼까 봐 두렵다'는 생각부터 든다. 정책 소개보다는 상대 정당을 비방하고 저주하는 내용으로 양당이 현수막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을 친일파 이완용에 빗대는가 하면, 이재명 대표를 범죄자로 단정 짓는 식이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요즘엔 상대 정당에 나쁜 이미지를 덧칠하기 위해 비방 현수막에 일부러 상대 정당의 상징색을 가져다 쓰는 전략도 구사한다. 그러다 보니 현수막 색깔이 빨강 파랑 원색으로 요란해서 도시 미관을 해친다.

양 극단의 충성 지지층 말고는 누가 이런 살풍경을 반길까. 그럼에도 현수막 제작 비용의 절반 가까이는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간다. 양당의 한 해 수입 중 절반 정도는 국가 예산으로 충당되니 말이다. 세금 낭비가 따로 없다.

올 들어 시작된 이런 한심한 사태는 지난해 말 옥외광고물법이 개정된 것이 계기였다. 야외에 현수막을 걸기 위해서는 지자체 허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정당이 거는 현수막은 이런 규제를 받지 않아도 되도록 국회가 법을 바꿨다. 누가, 왜 바꿨을까. 소모적인 비방전으로 번질 것을 예상하지 못했나. 당시 국회 회의록을 살펴봤다.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 횡단보도에 각 정당들의 현수막이 경쟁적으로 내걸려 있다. 뉴시스

2020년 9월 21일 행정안전위원회 소위원회.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처음 심사 테이블에 올랐다. 대표 발의한 김민철 민주당 의원이 총대를 멨다. 그는 ‘정당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활동의 자유를 가진다’고 정한 정당법을 근거로 법개정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때만 해도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는 “안전과 환경 문제가 우려된다”며 신중한 입장이었다. 의원들 입장은 갈렸다. 김형동 국민의힘 의원은 “굉장히 좋은 법안”이라고 찬성한 반면, 이형석 민주당 의원은 “혹세무민하는 내용이 현수막에 담길 수 있고, 환경과 국민 안전을 저해할 수 있다”고 반대했다. 이명수 국민의힘 의원도 반대했다. 정치인에게만 특혜를 주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이유였다.

2021년 11월 22일 2차 회의. 행안부와 이형석 의원 등은 반대 의견을 지켰다. 이명수 의원이 찬성 입장으로 선회했다. “유권자의 알 권리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2022년 5월 4일 3차 회의. 개정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행안부가 법 개정 찬성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행안부는 김민철 의원 안보다 한발 더 나갔다. 원래 김 의원 안에는 ‘현수막 개수는 읍·면·동별로 1개를 초과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현수막 난립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그런데 행안부는 현수막 개수 규제마저 없애자고 했다. 왜 그랬을까. 논의 흐름에 비춰 보면 행안부는 현수막 개수의 한도를 정할 경우 지자체의 현수막 단속 등 관리 책임이 커질 수 있는 점을 우려했던 것 같다. 규제 완화 목적을 달성한 여야 의원들은 여기에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결과 정당들은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원하는 만큼 현수막을 걸 수 있게 됐다. 특권 앞에선 여야가 없는 정치권의 동지 의식, 그리고 뻔히 내다보이는 부작용에도 눈을 감는 행정 편의주의가 어우러진 합작품으로 기록될 만하다. 그 대가는 전 국민이 두 눈으로 치르고 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