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플라자]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기’ 가능할까?

천현우 얼룩소 에디터·前용접 근로자 입력 2023. 3. 23.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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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주 69시간제’ 근로시간 개편안이 발표됐다. 당일 진주에서 일하던 동생이 문자를 보냈다. “저거 통과되면 또 예전처럼 일해요?” 최대 68시간 일하던 때보다 더 나빠지냐는 물음이었다. 쉽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제도가 ‘주 52시간제’보다 훨씬 복잡했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리 어렵게 만들어놨지? 이유가 궁금해 근로시간 개편안 브리핑을 봤다. 보면서 생각했다. 이거 그냥 ‘권리로 말장난하기’ 아닌가?

노동부는 주 52시간제를 ‘획일·경직적 상한 규제 방식’이라고 비판했다. 산업사회에서나 통할 법한 단순하고 뻣뻣한 제도란 얘기다. 그런데 정부는 그 단순함과 뻣뻣함이 오히려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개편안은 주 근로시간을 노사가 합의해서 결정하기로 되어 있다. 노동부는 이를 노사의 ‘선택권’을 확대하는 취지였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노동자의 선택권이 증가할까? 아니다. 제도를 이렇게 만들면 거의 무조건 회사가 유리한 방향으로 근로시간이 정해진다. 회사는 노동자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반면 52시간제는 상호 불가침 조약이다. 노사가 서로 못 건드리므로 결과적으로 평등하다. 노동부는 주 52시간제 탓에 장시간 근로와 공짜 야근 등의 편법이 생겼다고 말한다. 이런 편법은 옛날부터 있었다. 이 역시 회사가 노동자보다 강하기에 발생하는 일이다. 노동자는 편법인 걸 알아도 불이익을 받기 싫어서 참고 일한다. 하지만 지금은 참다 참다 안 되면 증거를 모아 고용노동부에 진정 제기라도 할 수 있다. 개편안이 통과되면 이조차 못 하는 거 아닌가.

개편안은 이외에도 우려를 자아낸다. ‘건강권’을 얘기하면서 한국이 OECD 평균보다 약 39일 더 많이 일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연장근로 ‘총량’을 줄이겠다고 한다. ‘총량’은 전혀 핵심이 아니다. 애초에 과로가 왜 생길까? 일을 몰아 시켜서 생긴다. 반년 동안 주 79시간 몰아서 일하기보다 1년에 주 40시간 나눠서 일하는 쪽이 총량은 커도 훨씬 건강한 노동이다. ‘휴식권’ 또한 말장난이다. 노동부가 말하는 ‘몰아서 일하면 몰아서 쉬기’는 예비 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예비 인력이 많으면 처음부터 연장근로를 할 일이 없다. 게다가 한국은 멀쩡히 있는 연차 제도 사용률도 75% 수준이다. 이마저 눈치 보면서 쓰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번에 개편안을 두고 정부가 보인 움직임 또한 우스꽝스럽다. 근로 시간을 도로 늘릴 명분이 없다. 솔직하게 말 못 하니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댄다. 횡설수설 말이 길어지고 논리에 구멍이 뚫린다. 쏟아지는 반발에 제대로 대처 못해 언론이 붙여준 ‘주 69시간제’ 프레임에 갇혀 허우적댄다. 논란이 끊이지 않으니 결국 개편안을 물린다. 대통령이 보완책을 지시했다고 하는데 이미 여론은 싸늘하다.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아예 백지화돼도 이상하지 않을 듯하다.

정부의 노동개혁을 사사건건 반대하고 싶진 않다. 특히 노동시장 이중 구조를 해결하겠다는 목표는 높이 사고 싶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는 말도 안 되게 커졌다. 이걸 못 바꾸면 청년들은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더더욱 목매달 수밖에 없다. 20대를 몽땅 스펙 쌓기에 갖다 바치고, 경쟁에서 떨어지면 취업을 아예 포기해버린다. 한국 사회가 반드시 개선하고 극복할 문제다. 하지만 제도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말장난으로 혹세무민하는 정부 모습을 보면 신뢰감이 뚝 떨어진다. 보수는 그간 개혁이 성급하다고 비판해왔다. 그렇다고 전 정부의 제도를 일단 부수고 보는 행위 또한 성급한 건 마찬가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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